유엔은 북한의 현금지급기?

  • 입력 2007년 3월 14일 19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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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대학을 위해 300대의 컴퓨터 구매를 지원했다. 하지만 사 준 물건을 구경할 기회도 없었다. 한달 반동안 북한당국을 졸랐다. 고작 컴퓨터 2대가 놓여 있는 방으로 안내됐다. 나머지 컴퓨터는 상자 안에 있다는 설명만 들었다. 상자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엔 개발계획(UNDP)이 평양사무소를 통해 북한에게 사용처가 불분명한 거액의 사업자금을 전달했다는 의혹의 일부가 11일 공개됐다.

미국 일간지 시카고 트리뷴은 이날 익명의 유엔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유엔은 북한의 현금지급기(ATM)였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신문의 워싱턴 지국장은 미국 정부 및 유엔 관리 인터뷰를 통해 '평양에서 벌어진 일'을 재구성했다.

UNDP 평양사무소에선 유엔 직원 4명, 현지고용인 20명이 근무해 왔다. 매일 북한 관리가 사무실에 들러 받아가는 노란 마닐라 봉투에는 현금이 가득하다. 영수증은 발급된 적도 없다. UNDP 규정은 '현금지급은 현지 화폐로만 한다'고 돼 있다. 유엔 직원은 북한관리의 동행 없이는 사무실 밖에 나가기 어렵다. 은행에도 갈 수 없다. 평양 밖을 나가려면 1주일 전에 군부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 이렇게 전달된 돈이 많게는 1억5000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북한경제개발을 돕는 UNDP는 북한에서 '항공교통서비스 지원을 위한 인력양성' 및 '의류산업 사업소 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해 왔다. 연간 지원액이 300만~800만 달러로 추산된다.

이런 예산집행에도 불구하고 평양사무소의 회계담당자와 감사는 북한인이었다.

신문은 지난해 5월 이런 문제점과 유엔규정 위반사실을 보도했으나, 몇 개월 동안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고 전했다. UNDP 대변인은 최근 "현금 지급이나 현지인 고용은 북한과 같은 독재국가에선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으며, 실제 북한에서 쓰인 돈은 책정예산과 달리 1년 평균 수백만 달러에 불과했다"고 해명했다. UNDP는 1월 문제가 불거진 뒤 3월 현금지급 중단 조치를 내렸다.

신문은 "올 1월 이후 유엔 회계감사단이 감사개시를 통보했지만, 40일이 지나도록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며 유엔 감사결과의 효력에 의구심을 제기했다.

그 근거로 3월1일 폐쇄된 평양사무소 방문을 위한 유엔 감사팀에게 북한이 비자를 내 줄 리 만무하며, 평양 사무소의 서류가 외부로 전달되는 데에만 수개월이 걸릴 것이란 점이 제시됐다.

이 신문은 13일자에서 다시 이 문제를 거론하면서 "이라크 사담 후세인에게 '석유-식량 프로그램' 제도 악용을 통해 현금을 전달한 유엔이 이번에는 핵개발을 해 온 김정일 위원장에게 다시 거액의 달러 자금을 현금으로 조달했다"고 썼다.

워싱턴=김승련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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