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총장 아프리카 순방 동행취재]<2>에티오피아

  • 입력 2007년 1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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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 몇 장… 사탕 몇 알… 초라한 상점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한 상점. 썰렁한 선반에 몇 안 되는 상품이 초라하게 진열돼 있다. 1960년대 이래 성장을 멈춘 에티오피아의 현주소를 보여 준다. 아디스아바바=공종식  특파원
비누 몇 장… 사탕 몇 알… 초라한 상점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한 상점. 썰렁한 선반에 몇 안 되는 상품이 초라하게 진열돼 있다. 1960년대 이래 성장을 멈춘 에티오피아의 현주소를 보여 준다. 아디스아바바=공종식 특파원
다리 한쪽을 잃고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는 에티오피아의 한 장애인. 옆에는 개 한마리가 축 늘어진 채 잠을 자고 있다.
다리 한쪽을 잃고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는 에티오피아의 한 장애인. 옆에는 개 한마리가 축 늘어진 채 잠을 자고 있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에티오피아 노병들이 참전용사회 사무실에 모였다. 이름도 모르는 아시아의 작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이들은 “가난했던 한국이 많이 발전해 기쁘다”고 말했다. 아디스아바바=공종식  특파원
6·25전쟁에 참전했던 에티오피아 노병들이 참전용사회 사무실에 모였다. 이름도 모르는 아시아의 작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이들은 “가난했던 한국이 많이 발전해 기쁘다”고 말했다. 아디스아바바=공종식 특파원
2007년 9월 11일.

세계는 이날을 9·11테러 발생 6주년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에서 이날은 더 ‘특별한 날’이다. 에티오피아 달력 기준으로 새로운 밀레니엄(2000년 1월 1일)이 이날 시작되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는 오늘날에도 자신들만의 독특한 달력을 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태운 유엔평화유지군 소속 항공기가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한 2007년 1월 28일은 에티오피아에서는 1999년 5월 20일이었다. 적어도 공식 달력상으로는 다른 국가보다 시간이 8년 늦게 가는 셈이다.

○8년 느린 달력보다 지독한 정체

28일 오후 5시 아디스아바바 공항. 도심의 첫인상은 상쾌했다. 밤거리에도 활기가 느껴졌고 시가지는 정돈되어 보였다. 기후도 높은 지대라 시원했다.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버스 안에서 취재단의 한 기자는 “(이곳에 오기 전 들렀던) 콩고민주공화국보다 20년은 현대화가 빠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쾌한 감정은 1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호텔에 도착하면 바로 뒤따라오기로 한 짐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수차례 “30분 뒤에 도착한다”는 말을 믿고 기다렸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나도 짐이 도착하지 않자 일부 방송 기자들은 마감시간을 놓쳤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짐이 반 총장 일행을 따라 귀빈 출입구를 통해 별도로 나왔는데도 속수무책이었다. 짐을 찾은 것은 1월 29일 오전 1시가 넘어서였다.

호텔에서는 한국으로 거는 국제전화가 아예 불통이었다. 통신 인프라가 열악한 상황에서 29일부터 이틀간의 일정으로 아프리카연합(AU) 정상회의가 열리다 보니 빚어진 현상이었다. 이곳에서 8년 느린 것은 ‘달력상의 시간’만이 아니라는 걸 절감했다.

○시내 중심가에서 구걸에 나선 어린이

29일 오전 아디스아바바 중심가 포스타벳 거리. 국방부, 국영 TV 방송국, 국립극장, 중앙우체국, 국립병원 등 주요 관공서와 기관이 몰려 있는 곳이다.

이날은 AU 정상회의 때문에 차량이 유독 많았다. 도시가 해발 2350m에 있는 데다 차량들이 뿜어내는 매연이 도시를 가득 메워 제대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생산된 지 20∼3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고물 차량들이 택시와 버스로 쓰이고 있었다. 도로 곳곳에 걸인들이 눈에 띄었다. 외국인들로 보이는 승객들이 탄 차량에는 예외 없이 이들이 나타나 “1비르(에티오피아 화폐 단위·약 110원), 1비르”라고 외치면서 창문을 두드렸다. 코흘리개 어린이들도 거리로 나서 1회용 휴지를 사라고 졸졸 따라다녔다.

취재진 차량을 운전하는 데이비드 씨에게 구걸을 하면 얼마나 벌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잘하면 하루에 20비르까지 벌 수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변변한 일자리가 없는 에티오피아에서는 하루 종일 육체노동을 해도 일당이 10비르에 불과하다. 어떻게 보면 이들로선 거리로 나선 게 ‘경제적인 선택’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960년에서 시곗바늘이 멈춘 나라

2005년 기준으로 에티오피아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26달러. 아프리카 안에서도 최빈국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에티오피아는 한때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나라였다. ‘솔로몬과의 로맨스’로 유명한 시바 여왕의 나라로 문화적 자긍심을 가졌고, 아프리카에선 유일하게 식민 지배를 당하지 않은 나라였다. 경제적으로도 1960년대까지는 한국보다 잘살았다.

그러나 에티오피아는 다른 국가가 성장하는 동안 시곗바늘이 1960년대에서 멈췄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귀족층과 집권층을 위주로 한 정책을 펴면서 서민의 삶은 차차 어려워져 갔다.

1974년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멩기스투가 셀라시에 황제를 퇴위시키고 강력한 공산주의 정책을 폈지만 이는 에티오피아 경제에 보약이 아니라 그나마 남아 있던 시장의 효율성마저 정지시키는 독약이었다.

당시 얼마 되지도 않던 모든 기업은 국유화됐다. 북한과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북한 정부가 아디스아바바 시내 한가운데에 ‘주체사상탑’을 선물로 지어주기도 했다.

29일 이곳을 방문했을 때 주체사상탑이 자리 잡은 공원에는 사람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걸인 한 명만 탑이 정면으로 보이는 공원 입구에서 행인들에게 “한 푼 달라”며 손을 벌렸다.

1991년 멩기스투 정권을 축출한 친서방정권이 등장했지만 아직까지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생활 여건이 괜찮은 편인 아디스아바바(인구 350만 명)마저 국제사회의 원조와 이곳에 자리 잡은 유엔 및 국제기구들이 고용한 현지인들의 인건비에 의존하는 ‘기생(寄生) 경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한때 영광스러운 과거를 가졌던 에티오피아가 언제 빈곤에서 탈출할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까. 아디스아바바를 떠나며 집권자의 전략과 선택에 따라 국운의 성쇠가 한순간에 엇갈릴 수 있음을 절감했다. 잘못된 전략과 선택의 결과는 수십, 수백 년이 지나도 만회하기 힘든 깊고 큰 상흔을 남긴다는 사실에 새삼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디스아바바=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가난했던 한국 놀라운 경제성장에 뿌듯”▼

“한국, 지금 너무 빨리 커서, 나는 행복해요(Korea, now too fast going up. I am very happy).”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시내에 있는 한국전참전용사회 사무실. 29일 사전 연락도 없이 이곳을 방문했지만 6·25전쟁에 참전한 8명의 노병(老兵)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참전용사회에서 재정을 담당하고 있는 메젤 레테르가초 아베베(79) 씨는 한국 기자들이 찾아가자 매우 반가워하며 서툰 영어로 말문을 열었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6·25전쟁에 유엔군으로 참전했다. 당시 황실 근위병 6037명이 참전해 121명이 숨졌고 536명이 부상했다. 젊은 시절 평생 들어보지도 못한 아시아 국가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21일간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했던 용사들. 그러나 지금 이들의 삶은 빈곤 그 자체다.

참전용사회에 따르면 현재 생존자는 1000명 안팎. 이들은 대부분 한 달에 나오는 연금 40비르(약 4400원)로 어렵게 생활한다. 특히 1974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에티오피아와 북한과의 관계가 가까워지면서 참전용사들은 한때 찬밥 신세가 되기도 했다.

참전용사들과 그 가족 100가구 정도가 사는 코리안빌리지(한국촌)는 아디스아바바 외곽 구릉지대인 웨레다 및 케벨레 지역에 있다. 아디스아바바에서도 대표적인 빈민가다. 기자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판자들이 간신히 집을 둘러싸고 있었다.

1990년대에 한국 정부 초청으로 방한했던 아베베 씨는 “한국이 전에는 매우 가난한 나라였는데, 너무 많이 바뀌어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최근 이곳에 반가운 일이 하나 생겼다. 한국촌에 있는 학교(Hibert Fire School)가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새 시설을 갖추고 완전히 새로운 학교로 바뀌었다는 점.

이 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치는 프레우 제리훈(28) 씨는 “한국 정부의 도움으로 도서관 실험실 같은 건물을 새로 지었다. 컴퓨터와 같은 학습도구도 많이 갖춰져서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매우 좋아한다”고 전했다. 이 학교에서는 한국국제협력단 소속 교사 3명이 학생들에게 컴퓨터 등을 가르친다.

학교 시설이 좋아지고 교육의 질이 높아지면서 인근에서도 일부러 전학 오는 학생들이 많다고 제리훈 씨는 귀띔했다.

아디스아바바=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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