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 엽]배반당한 한국 민족주의

  • 입력 2006년 11월 10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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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칼럼 제목과 관련해 성균관대 서중석 사학과 교수에게 죄송하다는 말부터 해야겠다. 서 교수의 책에서 제목을 따 왔지만 취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서 교수는 서문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해) 이 땅을 반세기 가까이 지배한 극우반공주의의 정체를 드러내고 싶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자는 북한 지배세력과 그에 동조해 온 남한의 좌파에도 같은 문제를 던져야 할 때가 이미 지났다고 생각한다.

햇볕정책 이후 그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우리 민족끼리’다. 최근 금강산에서 남북 문인들이 합의한 ‘6·15 민족문학인협회 규약’에도 ‘우리 민족끼리의 이념에 기초하여’라는 말이 나온다. 북한의 ‘핵실험’도 ‘민족끼리’라는 말로 포장돼 남한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문제는 북한 지배세력의 민족관이다. 북한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우리 민족을 ‘김일성민족’이라고 부르고 있다. 김일성대 출신으로 2001년 탈북한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는 “김일성이 아니었다면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지 상태에서 병합돼 없어졌으며, 광복 뒤에도 미제 식민지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유로 지금도 노동신문 등에서 그렇게 쓴다”고 말했다.

서강대 박호성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저서 ‘남북한 민족주의 비교 연구’에서 “북한에서 민족은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생활을 마련해 가는 사회생활의 기본 단위이며 혁명과 건설의 투쟁 단위로 이해된다”며 “민족문화를 특징짓는 ‘민족어’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인식되며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수단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86년 제창한 ‘조선민족제일주의’도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북한식 사회주의를 자부하도록 만드는 이념적 동력이라는 것이다.

한반도에 터를 잡고 함께 살아온 우리 민족이 ‘민족’ ‘민족의식’에 눈을 뜬 것은 100여 년 남짓하다. 그중 반세기 동안 북한은 민족을 사회주의 수단으로 교육하고 있고, 주체사상과 결합해 김일성민족을 ‘발명’했다.

20세기민중생활사연구단(단장 박현수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이 낸 ‘한국민중구술열전’에서 개인사를 밝힌 여기원(1933∼2005) 씨는 생전에 “일제강점기였던 어릴 적 황국신민화 교육으로 왜놈이 다 됐다”며 “이북에 있는 아이들도 김일성 어버이 수령 하는 거 진심이야, 내가 겪어 봤거든”이라고 말했다. 동갑인 박희춘(경북 청도군) 씨도 “일본놈들이 학생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며 “초등학교 5학년 때 천황이 항복했다는 소문을 듣고 울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교육의 결과는 이처럼 무서웠다. 그렇다면 북한에서 ‘민족끼리’를 교육받은 이들은 어떨까. 북한 방송에 나오는 호전적인 언어와 전투적 몸짓, 수령과 당이 영도하는 사회생활을 보면 한반도에는 2민족 2국가가 현실화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주성하 기자는 “김일성민족이라는 개념이 허무맹랑하기 때문에 지배세력이 바뀌면 금방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도 일리가 있지만 남한의 친북좌파가 ‘민족끼리’라며 얼싸안는 이들은 ‘김일성민족’에 열광하는 북한 지배세력이다. 민족주의는 안팎의 위기가 고조될 때 격렬해지는 이데올로기라는 말처럼, 그들의 ‘민족끼리’는 지배권 보장의 수단이다. 이에 눈 딱 감고 포옹만 하는 게 민족을 위한 길인가?

허 엽 문화부 차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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