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심규선]한일정상회담 이삭줍기

  • 입력 2006년 10월 17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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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있었던 한일 정상회담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꼭 논의하고 확인해야 할 문제들이 북한의 핵실험이라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회담 후는 더 심하다. 오직 북핵, 북핵뿐이다. 다른 것에는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조금이라도 얻은 게 있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손에는 떨어진 게 없다. 아베 총리는 취임하자마자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망가뜨린 양국관계를 복원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북핵 해법을 둘러싸고 노 대통령과 인식차를 보인 게 오히려 그의 국내 입지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말도 나온다.

북핵에 가려진 논의에도 주목해야

그러나 숨을 고르고 따져봐야 한다. 우리는 아베 총리와 만나 무엇을 얻으려 했던가. 역사 문제가 주된 의제이고, 북핵은 그 다음이었다. 공교롭게도 회담 당일 북한이 핵실험을 하는 바람에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지만, 그 사실엔 변함이 없다.

결과야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북핵 분위기에 휩쓸려 나머지 논의 내용까지 모두 쓰레기통에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역사 문제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이삭을 줍는 심정으로 역사 문제에 대한 두 정상의 발언과 의미를 챙겨야 한다. 북핵 문제와 달리 역사 문제는 두 나라가 하기 나름이다.

우선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겠다는 아베 총리의 말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러나 한국으로서는 11년 전의 담화를 계승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아베 총리가 진정으로 한국, 나아가 아시아와의 화해를 원한다면 무라야마 담화를 넘어 독자적이고 진일보한 ‘아베 담화’를 새로 만들겠다는 각오를 보여주길 바란다. 역사는 쓰이기도 하지만 쓰기도 한다.

그런 성의의 표시로 일본은 제2기 한일역사공동위원회를 하루빨리 발족시키는 게 좋다. 비록 제1기 역사공동위원회의 성과는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싸울 때 싸우더라도 소통의 통로는 열려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싸워도 덜 싸운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는 노 대통령도 아베 총리의 ‘카멜레온 전략’을 용인했다. 안 간다는 확약을 받진 않았지만, 안 갈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쪽의 전략적 모호성은 언제 깨질지 모른다. 신뢰의 파열음은 더 크다. 아베 총리가 발걸음을 하지 않는 게 먼저고, A급 전범의 분리나 새로운 형태의 추도시설을 만드는 방안도 이제는 검토할 때가 됐다.

궁극적으로는 일본 정부가 ‘북한 때리기’로 역사문제를 가릴 수 있다는 유혹을 단절해야 한다. 최근 일본에서는 북핵이라는 ‘화급한 문제’를 갖고, 역사라는 ‘더 중요한 문제’를 덮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북핵 문제가 돌출했다고 해서 역사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두 문제는 원인도 해결방법도 다르다. 과거사는 방치하면 방치할수록 현재의 문제로 돌아온다.

‘아베 담화’와 FTA재개를 기대한다

한국 정부도 한일관계를 최소한 노 정권 이전 수준까지는 회복시켜 놓겠다는 절박성을 가져야 한다. 모든 것을 일본 책임으로 돌리면 편할지는 모르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단기적으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은 정상 간의 셔틀외교를 부활하는 일이다. 이는 노 대통령도 필요성을 인정했으므로 실천에 옮기기만 하면 된다. 노 대통령의 임기도 1년 4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어떤 수준의 한일관계를 다음 정부에 넘겨줘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때다.

중단된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재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우리 정부는 일본 측이 제시한 양허안이 우리 것과 너무 차이가 나 그만뒀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원래 일본을 싫어하는 노 정부의 정치적 판단 때문이라는 것이다. 필요하니까 협의를 시작했을 것이다. 초심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미국 다음에 FTA 협상을 해야 할 나라가 일본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한일 정상회담에서 주울 이삭은 의외로 많다.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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