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분단국 출신 수장… 북핵 중재 기대

  • 입력 2006년 10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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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 무겁습니다”3일 새벽(한국 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사무총장 선출 4차 예비투표에서 압도적 지지를 얻어 사무총장 당선이 사실상 확정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왼쪽)이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외교부 청사에 출근해 유엔 담당인 강경화 국제기구국장(오른쪽)을 비롯한 직원들과 악수하고 있다. 홍진환 기자
“어깨 무겁습니다”
3일 새벽(한국 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사무총장 선출 4차 예비투표에서 압도적 지지를 얻어 사무총장 당선이 사실상 확정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왼쪽)이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외교부 청사에 출근해 유엔 담당인 강경화 국제기구국장(오른쪽)을 비롯한 직원들과 악수하고 있다. 홍진환 기자
1954년 말 미국 B-29 폭격기가 중국 영토에 불시착했다.

서로 총부리를 겨눈 6·25전쟁 직후였다. 중국은 승무원 17명을 간첩으로 몰아붙였고, 신생 중공(中共·중화인민공화국)과는 아예 접촉 자체를 꺼리던 미국의 분노는 확산됐다. 미 의회에선 핵 공격(nuclear strike) 얘기까지 나왔다.

일촉즉발의 순간,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이 중재에 나섰다. 포스터 덜레스 당시 미 국무장관이 “진짜 중공에 가려고 하느냐”고 물었을 정도. 유엔 사무총장의 역할에 아무도 기대를 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미 유엔은 중국의 태도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뒤. 그런 유엔에서 누가 오든지 중국도 탐탁지 않았다.

그러자 함마르셸드 사무총장의 유명한 ‘베이징 포뮬러(Peking formula·베이징 방식)’가 빛을 발했다. 세계 평화가 위협받을 때 사무총장이 평화적 해결을 위한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다는 게 함마르셸드 총장의 논리였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와의 협상은 6개월을 끌었지만 결국 조종사 4명이 석방됐다. 1955년 7월 말 50회 생일을 맞아 스웨덴 남부에서 휴가를 즐기던 함마르셸드 사무총장은 저우 총리의 전보를 받는다. 나머지 승무원 전원이 중국을 떠났으며 그의 노력에 감사한다는 내용이었다.

‘유엔 사무총장=국제사회 분쟁 조정자’라는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이후 국제사회에서 분쟁이 발생하면 세계 언론들은 ‘다그에게 맡겨라(Leave it to Dag)’라고 촉구하곤 했다.

○ 차기 사무총장의 역할과 과제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이자 아직도 공식적으로는 ‘전쟁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한국에서 유엔 사무총장이 나온다. 그러나 반 장관이 차기 사무총장으로 사실상 확정된 날에 맞춰 북한은 핵실험 강행 의사를 공언하고 나섰다. 그만큼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 정착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럼에도 앞으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것이라는 기대감 또한 작지 않다. 적어도 한반도의 운명이 강대국 손에서만 결정되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쟁으로 번지는 상황을 막기 위해 조정과 중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다.

그러나 유엔 사무총장은 국제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반기문 사무총장’이 북핵문제 해결에 개입하는 것이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던 가나의 코피 아난 사무총장도 ‘출신 대륙’인 아프리카 수단의 다르푸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학살의 참극을 해결하지 못했다. ‘21세기 최대의 비극’이라는 그 다르푸르 사태다.

미국의 격월간 외교전문지인 ‘포린 어페어스’ 9, 10월호는 ‘차기 사무총장’이라는 논문에서 차기 유엔 사무총장의 과제로 세계 평화와 정의, 삶의 질, 인권 문제에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엔 창립(1945년) 당시는 물론이고 냉전 종식 이후의 환경 변화에 맞는 새로운 유엔의 위상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당면한 유엔의 현안은 △정치적으로는 북한과 이란의 핵문제 △경제적으로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격차 해소 △내부적으로는 개도국들이 요구하는 유엔 총회의 권한 확대와 맞물린 유엔 개혁 문제를 각각 꼽을 수 있다.

냉전 종식 이후 등장한 ‘비국가단체(Non-State Actor)’에 의한 불법 활동과 개도국의 내전, 대량살상무기(WMD) 확산 방지도 차기 총장의 주요 과제 중 하나다.

○ 역대 사무총장의 역할 변천사

유엔은 냉전 이후 ‘세계 정부’로서 적절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선진국은 물론 개도국의 비난을 받아 왔다. 영국 BBC방송이 2일 유엔 사무총장 자리를 두고 ‘회원국의 샌드백’이라고 표현할 정도.

유엔 사무총장의 권한도 모호하다. 유일한 근거는 “사무총장은 국제평화와 안전의 유지를 위협한다고 인정하는 사항에 관해 안보리의 주의를 환기할 수 있다”고 규정한 유엔 헌장 99조.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유엔 사무총장의 역할을 ‘회의 주재자(moderator)’ 정도로 여겼다고 포린 어페어스가 소개했다.

트뤼그베 할브단 리 초대 사무총장이 유엔본부 터를 물색하는 데 임기의 대부분을 소비한 것도 이런 모호한 위상 때문이었다.

함마르셸드 2대 사무총장이 들어서면서 유엔 사무총장은 비로소 국제분쟁의 중재자라는 역할을 굳혔다. 아난 총장을 비롯한 후임 총장들의 눈높이도 여기에 맞춰졌다. 그러나 아난 총장은 2004년 이라크 석유식량계획을 둘러싼 스캔들에 아들이 연루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미국과의 관계 설정도 역대 사무총장들에겐 어려운 과제 중 하나였다.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6대 사무총장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맞서다가 재선에 실패했다. 제임스 루빈 당시 미 국무부 공보담당 차관보는 “미국과의 관계 조정 문제는 유능한 사무총장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했을 정도다.

BBC방송은 외교관으로서의 유연성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야 하는 게 192개 회원국을 이끄는 사무총장의 올바른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 반기문 장관 인터뷰

“믿기 어려운 일을 해낸 것 같다.”

4차 예비투표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15개 이사국 중 5개 상임이사국을 포함한 14개국의 지지를 얻어 유엔 사무총장 당선이 확실시되는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외교부 장관 집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나서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반 장관은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지만 동시에 큰 책임을 느낀다”면서 “유엔의 개혁문제를 포함해 국제사회의 평화와 인권보호, 개발문제 등에서 많은 역할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4차 예비투표에서도 1위를 했는데 소감은….

“예비투표에서 안보리 이사국들이 신뢰와 지지를 보내 준 데 대해 크게 감사한다. 그간 유엔의 개혁과 장래 국제사회 문제점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비전과 의견을 유엔 회원국에 제시했다. 많은 국가가 이에 공감을 표시한 결과라 생각한다. 특히 유엔 개혁에 한국적 (개혁) 경험을 활용할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유엔의 개혁과제는 무엇인가.

“유엔은 창립 후 60년 동안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 개발과 인권보호에 많은 공헌을 했다. 하지만 세계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특히 대량살상무기(WMD) 확산과 테러 문제 등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갖가지 위협과 도전을 맞아 효과적으로 대응했는지에 대한 의문과 비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사무국 자체에서도 업무의 비효율성, 부정부패 등에 대한 비판이 나와 유엔이 개혁을 통해 21세기 도전과제를 잘 해결해 나가는, 좀 더 적실성 있고 유효하며 효과적인 기구로 태어나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긍정적 역할은 어떤 것인가.

“유엔 회원국도, 사무총장도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을 지지하고 있다. 그간 코피 아난 사무총장도 (대북 관련) 특사를 임명하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많이 했다. 한국인으로서 유엔 사무총장이 된다면 남달리 깊은 이해와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한반도 평화와 안전, 남북한 화해 협력, 북한 핵문제의 조속한 평화적 해결을 촉진할 수 있도록 사무총장에게 주어진 권한과 위임을 최대한 활용하겠다.”

―외교부 장관직은 언제까지 수행하나.

“유엔 총회 인준절차까지 보고 인사권자인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협의해서 대통령이 판단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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