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는 문명간 파워게임… 자주보다 국익 우선해야”

  • 입력 2006년 6월 19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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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한 기자
전영한 기자
“세계외교사는 이질 문명 간 충돌의 역사이며, 이는 대외인식의 개념의 충돌이라는 점에서 결국 개념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용구(69·외교학) 한림대 한림과학원 원장이 ‘세계외교사’를 냈다. 무려 200자 원고지 5500여 장 분량의 방대한 저작이다. 1989년 원고지 3000여 장 분량으로 펴낸 책을 대폭 확대 보강한 것이다. 나폴레옹전쟁∼제2차 세계대전의 근대 세계외교사가 문명의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조명된다.

“일선(서울대 외교학과 교수)에서 한발 물러선 뒤 여유를 갖고 제 책을 꼼꼼히 읽다보니 부끄러웠습니다. 전통적 세계외교사라는 것이 결국 19세기 이후 유럽열강의 팽창의 역사인데 그 팽창의 대상 지역에서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유럽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길을 저는 문명 충돌의 역사라 생각하고 책을 처음부터 다시 쓴다는 각오로 덤벼들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태어난 세계외교사는 크게 유럽, 슬라브, 이슬람, 유교 문명권 그리고 조선의 문명 충돌의 역사를 다룬다.

“19세기 중반까지 동아시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사대질서의 지배를 받다가 아편전쟁을 필두로 서구의 만국공법(萬國公法)의 질서와 충돌이 발생합니다. 사대질서가 만국공법의 질서로 바뀌면서 중국은 과거 조공국을 서양의 속국 개념으로 변화시키려 했고 조선은 이에 저항을 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한중일 3국의 근대화의 속도차가 발생하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영국이었습니다.”

한국의 근대화에서 영국의 역할은 두드러지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19세기 세계질서의 균형자로서 영국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이 조선을 근대화의 오지(奧地)로 남겨두게 됐다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영국의 당시 동아시아 전략은 자신의 면방직 제품의 시장 확보와 러시아의 남하 저지 등 두 가지였습니다. 조선은 중국에 비해 경제적 구매력은 형편없었고,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하기 전까지는 그 남하 저지선으로서 전략적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을 속방화하려는 중국의 정책에 협조함으로써 결국 조선을 근대화의 오지로 남겨둔 것입니다.”

김 교수의 문제의식은 한국의 이런 경험이 유발한 ‘오지사고(奧地思考)’를 파고든다. 오지사고는 근대화의 유입 속도와 중심 장소 양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국가가 갖는 독특한 대외인식을 뜻한다. 한국은 19세기(통일된 근대국가 완성), 20세기(냉전구도의 탈피), 21세기(세계화)의 국가 목표를 어느 하나 달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직도 오지사고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김 교수의 비판이다.

“한국의 오지사고가 낳은 현상은 2가지에서 확인됩니다. 하나는 국제정세를 자신의 관점이 아니라 항상 일본이나 미국의 눈을 통해서 바라본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실질보다는 형식을 중시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후자는 외래사상의 유입을 주체적으로 걸러낼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그에 대한 저항의식만 앞서다 보니 생겨난 것입니다. 한국의 외교가 미사여구의 문구에 치중하느라 실리를 놓치는 경우가 많은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김 교수는 이런 점에서 한국외교가 ‘이데올로기 외교’를 벗어나지 못했고, 한국학계가 ‘안테나 하나 없는 인터넷 천국’의 함정에 빠졌다고 비판한다.

“자주와 같은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는 외교는 중세의 외교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오지사고를 극복하지 못한 결과 서구의 담론체계에 주파수를 맞추지 못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학계에 필요한 것은 불확실한 정보로 넘쳐나는 인터넷이 아니라 정확한 주파수를 잡아낼 수 있는 안테나여야합니다.”

김 교수는 그런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작업의 하나로 한림과학원에서 ‘한국 인문·사회과학 기본개념의 역사·철학사전’의 집필을 지휘하고 있다.

“1850∼1950년 100년간 한국에서 형성된 국가·민족·사회·개인·시장 등의 50여 개 핵심개념이 어떤 굴절과 변용을 거쳐 형성됐는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결국 문명 충돌 과정에서 이 땅에서 벌어진 개념의 충돌을 다루는 셈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오지사고를 극복하게 도와줄 작업이라고 믿습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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