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한기흥]딜리셔스(delicious)

  • 입력 2006년 5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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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신혼 가정에 쌀이 떨어졌다. 실직자인 남편은 아침을 굶고 출근한 아내를 위해 어렵게 구한 쌀과 간장 한 종지로 점심 밥상을 차렸다. 집에 들른 아내는 수저를 들다 ‘왕후(王侯)의 밥과 걸인(乞人)의 찬. 이걸로 우선 시장기만 속여 두오’라고 쓴 남편의 쪽지를 보고 눈물이 핑 돌며, 왕후보다도 더 큰 행복을 느낀다. 궁핍했던 시절 수필가 김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은 많은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그런 남편은 이혼당하기 십상이다. 집집마다 음식물 쓰레기 처리가 고민인 시대 아닌가.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생전에 “조선 사람들에겐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기와집에서 사는 게 최고의 행복”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일부 당 간부를 제외한 북한 주민들 가운데 그런 행복을 누린 사람은 드물다. 만성적인 식량난으로 수백만 명이 굶어죽는 판이어서 강냉이죽으로라도 하루 세 끼를 때우고 연명할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김정일 정권 들어서 사정은 더 나빠졌다.

▷얼마 전 미국에 최초로 망명한 탈북자 6명 중 데보라(가명·25)라는 여성이 미국에서 처음 배운 영어 단어가 ‘딜리셔스(delicious·맛있는)’라고 한다. 그가 난생처음 먹어보고 별미라고 밝힌 도넛과 시리얼은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쉽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미국이 탈북자들에게 특별히 호사스러운 음식을 제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굶주림의 공포에서 벗어나 비로소 미각(味覺)의 즐거움에 눈떴을 그들이 안타깝다.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이 생소하게 생각하는 영어 단어 중의 하나가 ‘다이어트(diet)’다. 북에선 먹을 게 없어서 굶는데 이곳에선 살을 빼기 위해 일부러 굶는다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식도락(食道樂)이란 말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라고 한다. 미국의 탈북자들이 깨달은 맛은 ‘음식의 맛’보다는 ‘자유의 맛’일 것이다. 기아(飢餓)와 압제에 시달리는 북녘 동포들이 자유와 풍요의 맛을 일상에서 즐길 수 있을 때가 과연 언제 올까.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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