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 D-11]경기지사후보 진대제-김문수 인물 탐구

  • 입력 2006년 5월 20일 03시 02분


코멘트
진대제 후보가 1977년 서울대에서 전자공학 석사 학위를 받은 직후 교정에서 부인 김혜경 씨와 기념 촬영을 했다.
진대제 후보가 1977년 서울대에서 전자공학 석사 학위를 받은 직후 교정에서 부인 김혜경 씨와 기념 촬영을 했다.
김문수 후보가 노동운동을 하던 1981년 서울 관악구 봉천동 중앙교회에서 올린 부인 설난영 씨와의 결혼식.
김문수 후보가 노동운동을 하던 1981년 서울 관악구 봉천동 중앙교회에서 올린 부인 설난영 씨와의 결혼식.
《주요 광역자치단체장 후보 ‘인물 탐구’ 기획의 첫 번째로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여론조사 1, 2위를 달리는 한나라당 김문수, 열린우리당 진대제 후보의 이야기를 게재한다.》

▼10원짜리 빵도 못먹던 고학생 “지고는 못살아”▼

‘코리안 드림’의 전형.

진대제 열린우리당 경기지사 후보에 대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판잣집살이와 고학의 역경을 딛고 삼성전자 최고경영자(CEO)와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데다 175억 원의 재산까지 일구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고는 못 사는’ 집념으로 성공신화를 이뤄 냈다. 미국 유학 초기인 1979년 첫아들의 돌잔치 때 일찍 집에 온다고 철석같이 약속했건만 잔치가 시작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던 ‘일화’는 그의 승부 근성을 잘 보여 준다. 그날 오전에 시작한 후배 연구원과의 볼링게임에서 지자 “이길 때까지 친다”고 오기를 부리느라 그랬던 것.

경기고 2학년 2학기 첫 실력고사에서 전교 90등을 하자 그는 ‘너무 자존심이 상해’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렸다.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다 졸리면 그대로 드러누워 자고, 다시 일어나 공부하는 ‘오뚝이 생활’을 반복한 결과 경기고를 전교 6등으로 졸업하고 서울대 공대에 2등으로 입학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미국 국비유학생 공학전공 부문 1호로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로 떠난 뒤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딸 때까지 그는 줄곧 장학금을 받았다.

그는 35세 때이던 1987년 미국 IBM사를 떠나 삼성에 입사하면서 당시 이병철(李秉喆) 회장을 만나 “임원을 시켜 달라. 그래야 일을 제대로 한다”고 담판해 승낙을 받아 냈다. 30대 이사는 거의 전례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는 2년 뒤인 1989년 세계 최초의 16MD램 제품을 개발함으로써 ‘자리’에 대한 보답을 했다.

그는 외환위기를 겪던 1998년 삼성의 부천 반도체공장을 미국 기업에 매각하는 협상을 할 때 헐값 인수를 요구하는 상대방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한 방 때려 주고 싶은 생각이 나 엉겁결에 책상에 있던 돌 재떨이를 집어들었다”는 게 그의 설명.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한동안 그가 미국 협상자를 윽박지르면서 협상을 이끌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삼성전자 CEO로 발탁돼 1990년대 말부터 해마다 수십억 원의 연봉을 받았고, 현재 예금만 120억 원을 보유한 부자가 됐다. 실적으로 당당하게 평가받은 결과라고 하지만 윗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보고 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정보통신부 장관 시절에는 국무회의에서 처음으로 ‘파워포인트’로 업무보고를 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게서 ‘브리핑의 달인’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당시 영상물을 이용해 종합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인 파워포인트 사용은 기업체에서는 일반화돼 있었지만 관료사회에서는 그야말로 ‘혁신’이었다.

진 후보 선거 캠프의 한 관계자는 “어려웠던 어린 시절의 반작용 때문인지 1등주의, 실적주의, 성적주의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덜 인간적’이란 느낌이 들 때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고교 시절 서울 용산구 이촌동 철거민촌 판잣집에서 살았고 “10원짜리 삼립 크림빵을 못 사는 게 제일 슬펐다”고 술회할 만큼 혹독한 가난을 겪었다.

그는 2003년 3월 3일 정통부 장관 입각 발표 당시 자녀의 이중 국적 문제가 불거졌을 때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부인은 욕설로 가득 찬 인터넷을 보고 울면서 “뭐 하러 장관을 하느냐. 당장 사퇴하라”며 그를 원망했다. 그는 “일주일만 버텨서 ‘최단명 각료’라는 기록만은 만들지 않겠다는 절박한 생각까지 했는데 어쩌다 보니 현 정부 최장수 장관이 됐다”고 했다.

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

클릭하면 큰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위의 이미지 클릭후 새창으로 뜨는 이미지에 마우스를 올려보세요. 우측하단에 나타나는 를 클릭하시면 크게볼 수 있습니다.)

▼‘구멍난 고무신’ 운동권…의원 돼서도 낡은 아파트 살아▼

건患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