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바르도의 딜레마

  • 입력 2006년 4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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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의 파리 특파원을 지낸 기자치고 ‘바르도의 딜레마’를 느껴 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한물간 여배우 출신 브리지트 바르도(72)에게 관심을 갖는 프랑스인은 이제 거의 없다. 은막 은퇴 후 동물보호운동가를 자임해 온 바르도를 아는 프랑스인들은 “인간보다 동물을 좋아한다”고 비난하곤 한다. 인종차별 혐의로 수차례 사법처리됐기 때문이다.

이런 바르도에게 현지 언론이 관심을 가질 때가 있다. 그의 ‘보신탕 비하’ 발언이 한국에 알려져 한국인들이 벌 떼처럼 일어날 때다. 그제야 프랑스 언론은 ‘바르도가 무슨 말을 했기에…’라며 발언을 뒤늦게 소개하곤 한다.

한국에서의 격렬한 반응만 없었다면 유럽에 알려지지 않았을 발언이다. 이 때문에 파리 특파원들은 바르도 관련 기사를 써야 할 때마다 딜레마를 느낀다. 기사를 써서 비판하고 싶지만, 그의 말을 부각시킬수록 유럽에 한국을 잘못 알리는 데 일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18일 여야 지도부를 청와대로 초청한 만찬에서 일본의 독도 근해 수로 측량 계획을 두고 격한 발언을 쏟아 냈다. “일본 조사선은 군함의 지위를 갖기 때문에 침략적 행위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국민중심당 정진석 원내대표의 전언)

노 대통령은 심지어 “국방 당국자에게 ‘물리적인 실력 행사를 하면 해낼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명령만 내리시면 임무를 완수하겠다’고 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노 대통령은 25일 특별담화까지 발표해 “일본의 주장은 한국의 독립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질타했다.

후련하다. 정말 후련하지만 속 후련한 것과 외교 득실은 다른 문제다. 노 대통령이 지난해 3월 일본에 ‘각박한 외교전쟁’을 선포해 국민의 속을 후련하게 한 뒤로 일본은 독도와 역사교과서, 신사 참배 문제 등에서 더욱 도발 수위를 높이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노 대통령이 격한 발언을 쏟아 낸 다음 날인 19일 “국제법에 따라 확실하고 냉정하게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25일 노 대통령의 담화에 대해서도 “냉정히 대처하라”고 말했다.

냉정하다. 얄미울 정도지만 개인이든 집단이든 싸움에서 이기려면 냉정을 잃어선 안 된다. 특히 ‘명령만 내리시면…’ 같은 말은 쉽사리 국가 최고지도자가 입에 담을 말이 아니라는 게 외교안보 전문가들의 얘기다.

“악독하고 끔찍하여라.…1968년 이른 봄, 청룡부대 군인들이 갑자기 나타나 흉포하게도 양민들을 미친 듯이 학살했다. 하미 마을은 30가옥이 불에 타고 주민 135명의 시체는 산산이 흩어지고 태워졌다.….”(이용준의 ‘베트남, 잊혀진 전쟁의 상흔을 찾아서’)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 양민 학살의 어두운 기억이 있는 꽝남 성의 디엔즈엉에는 이처럼 끔찍한 문구를 담은 위령비가 서 있었다. 이를 접한 당시 주베트남 한국 대사관 측은 이 지역에 경제적 인도적 지원을 하며 문구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한국 측의 성의를 받아들인 지역 주민들은 문구를 수정하기보다는 아예 삭제하고 그 자리에 연꽃 문양을 새겨 넣었다. 역사를 수정하기보다는 아예 기술하지 않는 게 낫다는 주민들의 선택이었다. 그 연꽃에서 프랑스와 미국 같은 강대국과 싸워 이긴 베트남인들의 저력이 느껴졌다.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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