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민전 사건 29명 명예회복…총 밀반출도 민주화 인정 논란

  • 입력 2006년 3월 15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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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남주(金南柱) 시인을 포함한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이하 남민전) 사건’ 관련자 29명이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위원장 하경철·河炅喆)’에 의해 14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

그러나 활동자금을 마련한다는 이유로 개인 집에 침입해 금품을 훔치고, 예비군 훈련장에서 총을 밀반출한 행위에 대해서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해 논란이 일고 있다.

남민전은 1976년 2월 ‘반유신 민주화와 반제 민족해방 운동’을 목표로 조직된 비밀단체로, 1979년 연루자 84명이 검거된 남민전 사건은 유신 말기 최대 공안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 민주화심의위는 13일 제162차 심의회에서 남민전 민주화운동 심의 신청자 33명 가운데 29명의 행위를 유신체제에 항거한 것으로 판단하고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된 주요 인사는 김 시인을 비롯해 이수일(李銖日) 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 이학영(李學永) 한국YMCA 전국연맹 사무총장, 임준열(필명 임헌영·任軒永) 민족문제연구소장, 권오헌(權五憲)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양심수후원회 회장 등이다.

관련자 대부분은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가 적용돼 사형, 무기징역, 징역 15년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 가운데 김 시인은 1978년 9월 한국민주투쟁위원회(이하 민투) 조직원으로 가입해 활동하면서 남민전 기관지 ‘민중의 소리’에 저항시를 게재하고, 그해 12월 ‘독재자 박정희를 장사지낼 날이 왔다’ 등의 유신체제 비판 유인물 제작 및 배포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남민전의 중앙위원으로서 지도적 위치에 있던 이재문(1981년 옥중 사망), 신향식(1982년 사형 집행), 이해경 씨 등 3명에 대해서는 과거 행적을 포함한 추가 자료를 보완한 뒤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한편 이들이 행한 △고위 공직자 집에 침입해 금도끼와 패물을 훔친 ‘봉화산 작전’(1978년 12월 5일) △최원석(崔元碩) 전 동아건설 회장 집을 털려다 붙잡힌 ‘땅벌 사건’(1979년 4월 27일) △중앙정보부(옛 국가정보원)의 자금줄로 생각한 금은방을 털려고 했던 ‘지에스작전’(1979년 3월 5일) 등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됐다.

또 활동자금 마련을 위해 1978년 7, 8월경 예비군 훈련장에서 카빈 소총 1정을 화장실 창을 통해 군부대 밖으로 빼돌린 뒤 집 담 아래에 묻어둔 총기 밀반출 사건 역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됐다. 당시 관련자들은 소총을 형광등 박스에 담아 이동하는 등 치밀한 계획 아래 움직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심의에 참가한 민주화심의위 관계자는 “암울했던 폭압적 상황 아래에서 전단이라도 뿌리고 지속적으로 활동하려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을 것”이라며 “밀반출 총기의 경우 고장 난 소총 1정이고 총알도 없어서 무기 자체가 위협적인 게 아니었다”고 밝혔다.

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남민전 사건:

1970년대 후반 북한의 적화노선에 추종해 비밀리에 활동한 대규모 반(反)국가 지하당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의 약칭인 남민전은 1976년 2월 결성 이후 1979년 10월 적발될 때까지 은밀하게 활동했다. 수사기록에 따르면 1차적으로 민중 봉기를 유발하고 이를 인민해방군으로 발전시켜 국가전복 투쟁을 전개하다가 북한의 도움을 받아 사회주의혁명을 성취한다는 기본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베트콩식 투쟁방식을 도입한 자생적인 공산주의 조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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