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레굴루스와 풀케르

  • 입력 2006년 3월 1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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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정관 레굴루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 때 등장하는 패장이다. 기원전 256년 카르타고와의 싸움에 패해 포로로 잡힌 레굴루스는 이듬해 카르타고의 강화사절로 로마에 파견되는 아이러니컬한 운명에 처한다. 부하들을 볼모로 잡힌 그는 ‘강화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카르타고로 돌아온다’는 약속을 하고 로마에 갔다.

하지만 로마 원로원에서 레굴루스는 오히려 카르타고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와서 강화하면 지금까지의 희생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레굴루스의 웅변에 원로원은 강화 제의를 거절했다. 레굴루스는 약속대로 카르타고로 돌아간 뒤 코끼리들에게 걷어차여 죽임을 당했다. 그는 전쟁에 졌지만 패전의 핑계를 대지도, 줄행랑을 치지도 않고 명예롭게 죽었다.

노무현 정부 3년 동안 국민은 너무나 많은 핑계를 들어야 했다. 노 대통령은 취임 3주년인 25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산행을 하면서도 “말로는 중간평가라지만 2년을 갖고 중간평가하면 결국 이미지 평가 아니냐”며 ‘지방선거=중간평가’라는 등식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선거라는 게 속셈을 뻔히 알면서도, 돌아서서 비실비실 웃으면서 나가서 시비하고, 선수들끼리 알면서도 부분적으로 국민을 속이는 게임”이라고 말했다. 2002년 12월 대통령 당선 직후 그해 대선을 ‘참으로 위대한 승리’로 극찬했던 노 대통령이 ‘선거=선수들끼리 국민을 속이는 게임’이라고 깎아내리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이보다 며칠 전에도 “일부 언론은 악의적인 왜곡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신문을 안 보는 게 세상을 옳게 보게 된다”(22일 이해찬 국무총리), “열심히 했는데 효과가 안 났다. 언론을 통해 왜곡된 부분이 많다”(21일 이백만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는 등 3년간 지겹게 들어온 ‘언론 탓’이 쏟아졌다. 오죽하면 여당 의원들까지 “이제 언론 탓 그만하라”고 했을까.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기업 내의 반대 세력(수구보수)과 비판적인 감사(언론) 때문에 실적을 제대로 내지 못했다. 그래서 주주총회(지방선거)에서 평가받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면 수긍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한민국이라는 기업의 최고경영진에서 나오는 핑계와 남의 탓은 주주(국민)들을 허탈하게 한다.

여권에서는 “노 대통령이 당장의 실적보다는 역사에서 평가받길 원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역사가 노 대통령이 ‘조선 통치의 틀을 세웠다’고 칭송한 정도전보다 한글 창제 같은 업적을 많이 남긴 세종대왕을 더 높이 평가한다는 건 초등학생도 안다.

‘로마인 이야기’에는 레굴루스가 죽은 지 6년 뒤인 기원전 249년 풀케르라는 또 한 사람의 집정관이 등장한다. 그는 전쟁에 패하고 로마에 소환돼 막대한 벌금을 물어야 했다. 벌금형은 패전 책임 때문이 아니었다. 출정 전 닭이 모이를 쪼는 모습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행사 때 모이를 쪼지 않는다는 이유로 닭을 바다에 집어던졌기 때문이다. 지도자답지 못한 처신으로 부하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엉뚱하게 닭을 탓한 풀케르와 묵묵히 패전 책임을 진 레굴루스, 둘 다 패장이었지만 누가 역사의 승자인지는 다 안다.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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