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본보 소송은 비판언론 재갈물리기 ‘정치소송’

  • 입력 2005년 8월 15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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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은 이미 국가정보원의 권한을 떠난 사안입니다. (동아일보에 대한 소송취하는) 청와대의 내락을 받지 않고는 불가능하니 (청와대를 납득시키기 위해서라도 동아일보가) 정정보도를 해야만 합니다.” (2003년 초 사석에서 만났던 국정원 고위 간부의 말)

“우리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어요. 당신들이 정정보도를 내는 것이 가장 문제를 쉽게 풀어가는 방법입니다.” (2002년 말 국정원 중간 간부가 정정보도를 내라며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한 말)

국정원이 2002년 10월 25일자 동아일보 A1면 머리기사로 보도한 ‘국정원 휴대전화 도청’ 폭로기사에 대해 민·형사소송을 낸 직후 국정원 간부들이 사석에서 한 이 같은 말들은 이 소송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바로 당시 김대중(金大中) 정권이 했던 언론사 세무조사와 같은 맥락으로 ‘비판언론 재갈 물리기’의 차원에서 이 소송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특히 당시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있었던 민감한 시기여서 국정원의 ‘부당한’ 소송은 정치적 의도가 짙게 깔린 것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즉, 이 소송은 법률적 소송이 아니라 정치소송이었던 셈이다.

당시 사회1부장으로서 이 기사의 취재 및 보도를 담당했던 필자가 보도 이후 국정원으로부터 받았던 압력은 괴로움이라기보다는 ‘불쾌함’의 연속이었다.

국정원 측은 일선 직원과 간부를 내세워 집요하게 정정보도를 요구해 왔다. 정정보도만 내면 일체의 민·형사소송을 취하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1면에 2, 3단 크기의 정정보도문을 내야 소송 취하가 가능하다고 고압적인 자세로 나왔다.

본보가 단호히 거부하자 나중에는 2면에 1단 크기라도 좋으니 정정보도를 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본보는 이러한 압력을 시종 거부했다. 그동안의 취재와 유력한 제보내용, 그리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할 때 당국의 거듭된 부인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권에서도 도청이 계속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필자와 국정원의 간부는 서울 광화문 근처의 한 음식점에서 만나 대화 중 서로 언성을 높이고 얼굴을 붉힌 일도 있었다.

당시 국정원은 본보에 대한 소송을 위해 국정원 조직법상 비밀로 해야 할 직원들의 이름과 직책을 공개하기까지 했다.

‘국가정보원이 주요 인사를 대상으로 도·감청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피고들(필자를 포함한 동아일보 기자 5명)은 이 사건 기사를 보도하여 국가정보원 내에서 통신기술 업무를 담당하는 원고들의 명예를 훼손하였으므로 피고들은 연대하여 원고 곽○○에게 3억 원, 원고 전○○, 최○○, 박○○, 홍○○에게 각 2억 원씩을 지급하라.’

국정원이 본보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낸 민사소송의 요지다.

소장에서 소송을 낸 국정원 직원들은 자신들이 통신기술 및 운영담당부서의 국장 또는 2, 3급 단장이거나 과장이라고 공공연히 직책과 이름을 밝히고 있다. 물론 이 간부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부의 지시로 소송을 냈다는 사실이 뒤에 밝혀졌다.

이 같은 민·형사소송은 법리적으로도 무리한 것이어서 검찰과 법원이 국정원 측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소송을 낸 국정원 직원 5명이 자신들의 명예가 훼손당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이었다.

기사에는 국정원 특정 직원의 이름이나 소속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 자체가 비밀로 되어 있는 원고들의 명예가 훼손됐다는 주장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국정원 측과의 이 같은 기싸움이 2년 반 이상 진행되는 동안 기사를 작성했던 사회1부 소속 기자 3명과 차장, 그리고 필자와 당시 편집국장이 차례로 검찰에 불려가 명예훼손 부분에 대해 피고소인 신분으로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사실 자존심이 상했으며 귀찮은 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협하지 않았던 것은 국정원의 불순한 의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정원이 법리적으로도 질 수밖에 없는 소송을 취하하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가면서 정정보도를 이끌어 내려 한 것은 법적수단을 동원해 압박함으로써 본보의 비판보도를 위축시키고 동시에 타 언론을 견제하려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국가권력기관에 의해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국민의 기본권 침해를 언론이 폭로하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다는 확신과 당장은 괴롭더라도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한편 국정원의 도청 중단 시기와 관련해 당시 본보에 제보를 했던 국정원 간부급 직원이 한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02년 9월 초순경 본보 기자를 만났던 이 직원은 그 기자가 며칠 전 정치권의 주요인사와 만나자는 통화를 휴대전화로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직원은 본보 기자에게 “그때 그 정치권 인사와 ○○호텔에서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느냐”고 되물어 취재진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정동우 사회복지전문기자 foru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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