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훈격 3차례 투표…2등급 대통령장으로 결정

  • 입력 2005년 2월 22일 18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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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선생 등 좌익계열 독립운동가 54명에 대해 22일 훈·포장 추서가 확정된 것은 지난해 8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발언이 계기가 됐다.

노 대통령은 당시 독립유공자 및 유족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좌우대립의 역사 때문에 묻어둔 역사를 발굴하고 포상하겠다"며 좌익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업적 재평가를 약속했다.

정부는 1990년부터 일부 좌익계열 독립운동가들에게도 포상을 해왔지만 이처럼 대규모로 포상한 것은 처음이다.

보훈처 공적심사위원회는 몽양 선생에 대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과 대통령장(2등급) 중 어떤 훈장을 수여할 것인가를 놓고 막판까지 난상토론을 벌였다. 신용하(愼鏞廈) 공적심사위원장도 이날 기자회견에서 "몽양 선생처럼 1심과 2심, 합동심을 통해 3차례에 걸친 논의 끝에 훈격(勳格)을 결정한 것은 전무후무하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한편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사업회와 유족 측은 선생의 공적을 감안할 때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이 아닌 대통령장이 추서되는 것에 불만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주요 인사들의 사회주의 활동 경력.

▼광복후 건국준비위원회 조직▼

▽여운형=1920년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에 가담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이르쿠츠크파 대표로 참석해 레닌에게 독립운동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1944년 좌익계가 중심이 된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한 데 이어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했다. 1945년 말 조선인민당을 조직했으나 이듬해 11월 조선공산당과 합쳐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될 때 여기에서 빠져 1947년 중도좌파 성향의 근로인민당을 세웠다.

▼조선공산당 상하이지부서 활동▼

▽조동호(趙東祜)=동아일보 기자로 재직 중이던 1925년 조선공산당 결성 멤버로 참여해 조선공산당 상하이지부에서 활동하다 1928년 체포됐다. 서대문형무소에서 4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뒤 여운형과 함께 '조선중앙일보'를 운영하다가 1944년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동맹을 거쳐 건준 선전부장(제1차 조직)을 맡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낙향한 뒤 1949년 여운형이 이끌던 근로인민당 간부들과 함께 전향성명서를 발표했다.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金在鳳)=1921년 조선독립단의 문건을 전달한 혐의로 체포됐다가 소련으로 망명했다. 1923년 초 코민테른으로부터 공산청년회와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임무를 받고 귀국해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며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 결성 때 초대 책임비서를 맡았다가 체포됐다.

▼고려공산청년회 결성 참여▼

▽권오설(權五卨)=1924년 조선노농총동맹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김단야(金丹冶) 신철수(申鐵洙)와 함께 조선공산당 마산지부 창당 준비를 지도했다. 1925년 박헌영(朴憲永)이 주도한 고려공산청년회 결성에 참여했으며 박헌영 체포 후 제2대 책임비서가 됐다. 1926년 6·10 만세사건을 계획했다가 체포돼 1930년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윤상호기자 ysh1005@donga.com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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