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그들만의 개혁

  • 입력 2004년 12월 15일 18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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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이후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4차례에 걸친 외국 방문은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정상외교로서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일 듯하다. 17, 18일 열릴 한일정상회담을 포함하면 노 대통령의 외국 방문 기간은 연말까지 4개월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39일. 방문국은 13개국이다.

그중에서도 11월 중순 남미 방문 중 이뤄진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 대통령과의 만남은 각별했던 듯하다. 노동자 출신인 룰라 대통령은 노 대통령에게 ‘특별한 동지의식’을 느낀다고 말했다고 한다.

최근 외신에 따르면 현실 노선으로 전환해 성공했다는 평을 듣는 이 ‘노동자 대통령’도 초기에는 시행착오를 겪은 모양이다. 그 일화 한 토막.

2003년 1월 취임하자마자 그는 각료들을 이끌고 자신이 성장한 레시페 시(市)의 빈민 슬럼가를 찾아 해변에 밀집한 천막촌 400가구를 이주시키는 재개발 계획을 지시했다. 그러나 버스로 1시간 거리인 임대 아파트단지로 졸지에 이주하게 된 주민들에게서 즉각 불만이 터져 나왔다. 어부 파출부 행상 등이 주업인 그들에게 해변은 생업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파트 이주는 “정책소비자인 주민의 요구를 도외시한 정치적 결정”이라는 반발에 부닥쳐 실패작으로 끝났다.

지구 정반대편에서 벌어진 이 해프닝은 개혁주의자들이 빠지기 쉬운 ‘정책 목표(이상)’와 ‘현실’ 간의 괴리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런 실패를 거울삼은 때문인지 이후 룰라 대통령은 ‘우(右)향우’해 철저히 실용주의로 일관하고 있다.

대조적으로 지구 이편에 있는 한국의 여권 지도자들은 경제위기의 원인을 ‘언론과 전(前) 정권 탓’으로 돌리면서 여전히 ‘자기 방식의 개혁’에만 매몰돼 있다.

특히 최근 만난 여권 인사들의 경제 인식은 아직도 실용주의가 자리 잡기에는 시행착오를 더 거쳐야 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안겨 준다.

“개혁이 선행돼야 경제 성장도 가능하다.”(한 대권 유력 후보)

“20년 전부터 경제위기 아닌 때가 있었나. 항상 나오는 얘기다.”(여당 고위 인사)

“언제 정치가 잘돼서 경제 성장이 이뤄졌나. 한국경제는 잘되게 돼 있다.”(여당 당직자)

문제는 최근 여권 지도자들을 향한 육두문자 섞인 욕설이 정작 개혁주의자들이 정치적 지지층으로 삼으려 하고 있는 서민들의 입에서 더욱 거칠게 쏟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서민들의 불만은 부동산 정책과 대기업 정책 등 이른바 ‘기득권 계층’을 잡겠다는 정책 목표가 한결같이 자신들을 옥죄는 현실로 나타난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다만 그런 서민들조차 대통령의 장기 외유를 놓고 나옴직한 “경제가 엉망인데 나라를 비우다니…”라는 비판만은 여전히 삼가고 있다. 이런 침묵의 바탕에 혹시라도 “두루 보고 느껴서 시행착오를 줄여 주었으면…”이란 안타까운 기대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려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지옥이 된다’는 서양의 경구가 있다. 새해에는 제발 더 이상의 시행착오를 멈추고 공허한 구호가 아닌, 현실에 뿌리내린, 서민들을 위한 민생정치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이동관 정치부장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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