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生은 없고 싸움만… 이게 ‘개혁국회’인가

  • 입력 2004년 12월 8일 18시 31분


코멘트
《“목소리만 컸지, 생산성은 가장 떨어진다.” 9일 폐회되는 17대 첫 정기국회의 성적표는 기대 이하였다. 7월 1일부터 발의된 1099개의 각종 법안 및 결의안 중 8일까지 처리된 안건은 186건(16.9%). 그것도 정기국회 폐회 하루 전인 8일에만 56개의 법안을 무더기로 통과시킴으로써 ‘목소리만 큰 비능률 국회’란 소리를 듣고 있다. 최소한의 ‘게임의 룰’도 무너졌다. 원내대표가 합의한 사안을 같은 당 원내부대표가 공개적으로 뒤집는가 하면 상임위에서 통과된 법안도 다시 제동이 걸린다. 여야 간에 대화다운 대화도 없는 그야말로 ‘정치 실종’의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협상채널이 없다▼

여야 원내대표는 그동안 수차례 만나 여권이 추진 중인 ‘4대 법안’과 기금관리기본법 국민연금법 등을 놓고 타협을 벌였다. 원탁회의도 열었다. 하지만 복안을 내놓고 상대방의 처지까지 배려해 사안을 매듭짓는 ‘진정한 협상’은 없다. 두 사람이 흉금을 털어놓고 소주 한잔 나눈 적도 없다. 한나라당 김덕룡(金德龍) 원내대표는 한때 열린우리당 천정배(千正培) 원내대표가 있는 자리는 아예 피해 다녔다. ‘물밑 협상’도 여야 강경파 의원들의 의혹어린 시선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쟁점 상임위의 여야 간사들도 마찬가지다. 자기주장만 앵무새처럼 펼치다 결국 몸싸움으로 마감한다. 서로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각서 정치’라는 새로운 조어도 등장했다. 교육위의 사립학교법 상정은 열린우리당 측이 한나라당에 “연내 처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주고서야 가능했다. 여야가 논란을 빚었던 공정거래법도 “11월 12일 표결 처리한다”는 각서까지 썼지만 이해찬(李海瓚) 국무총리 발언 파문으로 11월 18일 간신히 정무위를 통과했다.

국가보안법 폐지안 상정 과정에서도 “강행처리 안 한다”는 각서 교환을 놓고 여야 간 공방이 벌어지기도 했다.

상대 당 협상대표에 대한 인신공격성 발언도 오갔다. 열린우리당은 국보법 문제와 관련해 한나라당 김 원내대표와 법사위 장윤석(張倫碩) 간사, 주성영(朱盛英) 의원의 과거 전력 등을 거론하며 ‘국보법 폐지안 상정을 가로막는 3인방’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약속은 뒤집기 일쑤▼

여야는 지난달 25일 원탁회의에서 수도 이전 무산에 따른 후속조치를 논의하기 위한 ‘신행정수도 후속대책특위’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합의 직후 열린 여당 의원총회에서 충청권 출신 의원들이 “한시가 급한데 활동시한 6개월은 너무 길다”고 반발했다. 또 원탁회의 결과를 처리하기 위해 열린 운영위에서도 열린우리당 원내부대표들이 나서서 특위구성안을 반대하자 한나라당이 ‘약속 위반’이라고 반발했다. 결국 8일에야 본회의에서 특위구성안이 가까스로 통과됐다.

기업출자총액제도 유지 등을 골자로 한 공정거래법에 대해서도 여야는 9월 17일 “11월 12일 본회의에서 처리한다”고 합의했다. 당시 한나라당 측은 “안 되면 표결처리도 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이에 따라 지난달 18일 우여곡절 끝에 정무위에서 공정거래법이 표결로 통과됐다. 또 1일에는 한나라당 소속 최연희(崔鉛熙) 법사위원장이 표결을 선언해 한나라당 의원들이 투표에 불참한 가운데 법안이 통과됐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또다시 공정거래법 문제를 재론하면서 본회의 처리가 무산됐다.

같은 현안을 놓고 여야가 각각 다른 상임위에 법안을 제출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과거사진상규명관련법을 놓고 열린우리당은 행정자치위에, 한나라당은 교육위에 법안을 제출했다. 과거사진상규명의 주체가 열린우리당은 국가기관, 한나라당은 학계가 돼야 한다는 논거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8일 행자위에서 열린우리당이 법안을 상정하려 하자 한나라당 의원들이 “교육위에 제출한 법안과 같이 상정해야 한다”고 반대해 여당 내의 타협론자인 이용희(李龍熙) 위원장으로부터 “행자위 일정을 어떻게 교육위에 맞추느냐”는 호통을 듣기도 했다.

▼의원들도 제각각▼

8일 열린 국회 행자위는 법안심사소위에서 여야가 합의한 친일진상규명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여야 소위위원들이 합의한 법안의 일부 조항에 대해 몇몇 여야 의원이 반대하고 나섰다. 여야 간사들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발언을 계속하자 여야 의원들은 서로 “그건 당신네 당에서 주장했던 내용”이라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국보법 폐지안 상정을 놓고 여야가 격돌했던 3일 법사위 회의장에서는 회의가 열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여야 간사들 간에 말싸움이 수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그러자 열린우리당 정성호(鄭成湖) 의원이 같은 당 최재천(崔載千) 간사에게 “운영 똑바로 해라. 쇼하는 거냐 뭐냐”고 고성을 질렀다.

기금관리기본법 및 국민연금법과 관련해서는 한나라당 김 원내대표가 원탁회의에서 여당 안을 수용하려 했으나 이한구 정책위의장이 제동을 걸기도 했다. 국보법 폐지안 처리 여부를 놓고 여야가 격돌했던 2일 밤 열린우리당 김영춘(金榮春), 한나라당 남경필(南景弼) 수석부대표가 법사위원장실에서 “오늘은 이걸로 산회하자”고 합의한 뒤 여야 간사를 불러 합의 내용을 통보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최 간사가 “이대로는 못 끝낸다”고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자 남 수석부대표가 “수석들 간에 합의한 내용을 간사가 뒤집으면 어떡하느냐”고 얼굴을 붉히는 상황도 발생했다.

열린우리당 천 원내대표가 7일 “국보법 폐지안 연내 처리 유보”를 발표하자 같은 당 장영달(張永達) 임종인(林鍾仁) 의원 등은 “반드시 연내에 처리해야 한다”고 지도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