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정원]안보, 안녕하신가

  • 입력 2004년 12월 5일 17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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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했던 탈북자 간첩 활동이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충격적인 소식이지만 과거 동서독의 사례나 비약적인 탈북자 증가를 감안한다면 얼마든지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시기적으로 이른바 ‘4대 개혁 입법’ 중의 하나인 국가보안법 개정 및 폐지론과 맞물리면서 국가안보에 대한 우려를 증폭하고 있다.

▼탈북자 간첩활동 현실로▼

과거 서독은 대(對)동독 긴장 완화 정책인 동방정책을 실시하면서 엄청난 ‘간첩 사태’를 경험했다. 서독 사법기관이 1974년 현재 1만1000여 명의 동독 간첩이 서독의 정치권, 군사 산업 시설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공식 발표했을 정도다. 실제로 ‘독일 통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빌리 브란트 총리의 비서였던 귄터 기욤은 동독의 현역 군 대위였다. 기욤은 동독을 탈출한 것처럼 위장해 서독에 정착한 뒤 장기간의 잠복기를 거쳐 당국의 관심이 사라지자 서독의 심장부에 진입했다. 결국 국가안보의 핵심 현안과 동방정책의 기밀이 총리실을 통해 동독으로 흘러들어간 사실이 밝혀지면서 브란트 총리는 자진 사퇴했다.

이 외에도 동독은 자국민 탈출을 방조한 뒤 추적해 정보를 얻거나, 정보수집 조건으로 서독 이주를 허가해 주거나, 서독으로 탈출한 사람을 납치해 가는 등 다양한 방법을 구사했다. 통일 직전까지도 헬무트 콜 총리의 비서실장이 연루된 스파이 사건이 불거지는 등 서독 내부 교란 및 기밀 정보 유출이 계속됐다.

1994년 이후 증가해 온 탈북자 규모는 2002년을 기점으로 연간 1000명을 넘어섰고 올 10월 말 현재 6047명을 기록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탈북자 1만∼2만 명 시대도 머지않았다. 정부가 탈북자 200여 명을 특별관리 대상으로 추적하고 있다지만, 북한이 과거 동독과 같이 탈북자를 이용한 본격적인 대남 교란작전을 구사하려 한다면 상황은 매우 심각해질 수 있다. 이런 때일수록 정부 당국이나 국민이 안보의식을 확실히 해야 하고, 법제도를 엄격하게 운영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과연 현시점과 현재의 방식대로 국보법을 폐지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1948년 제정된 이래 국보법은 내부적으로는 ‘정권 안보’ 차원으로 악용돼 온 측면이 있지만 남북 대치 국면에 있어서는 국가안보를 유지하는 데 상징적인 역할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북한이 지난 수십 년 동안 국보법의 철폐를 주장해 온 것도 그 때문이다. 이번 탈북자 간첩 사건에서 보듯, 국보법은 간첩 활동을 처벌하고 규제하는 데는 필수불가결한 측면이 있다. 세계 각국이 테러리스트에 의한 안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관련법을 강화하는 상황에서 국보법을 철폐하고 형법, 남북교류협력법 등에만 의존할 경우 구체적인 간첩 활동에 대한 처벌 공백이 예상된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에도 한반도 전체에서의 인민민주주의 혁명 과업의 완수, 즉 적화통일 방침을 명시한 북한 노동당 규약은 변하지 않았다. 북한 형법도 여전히 남한을 원수의 나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국보법의 개폐를 대북협상 카드로 연계하지 못하고 북한의 대남 간첩 활동의 법적인 방패를 스스로 포기해야 하는가. 대북 화해 협력 정책을 추진하는 동시에 ‘간첩 사태’에 대비할 대책을 정부는 갖고 있는가. 간첩 활동을 하는 일부를 견제하면서도 대다수의 선량한 탈북자들에게 불이익이 돌아가지 않도록 할 ‘솔로몬의 지혜’를 강구해야 한다.

▼국보법마저 없앤다면…▼

끈질긴 동독의 간첩 공세에도 서독이 대범하게 대처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장기적인 마스터플랜 속에서 철저한 상호주의를 실현하고 동독 내 인권 개선도 유도하는 치밀한 통일 정책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지금 한반도 냉전이 사라졌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국가안보가 저절로 지켜지지는 않는다.

김정원 세종대 석좌교수·전 외교부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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