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말 안했으면 해결될 일을…”

  • 입력 2004년 9월 7일 18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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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국가보안법 폐지 발언이 열린우리당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폐지 쪽으로 가닥을 정리해 가던 상황에서 노 대통령의 입장 표명이 오히려 당에 부담만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폐지 쪽으로 당론을 정리하자니 ‘대통령의 거수기냐’는 한나라당의 비아냥거림이 기다리고 있고, 토를 달자니 당-청간 불협화음으로 비칠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의 발언은 분명 폐지론과 개정론을 놓고 긴장감이 감돌던 열린우리당 내 분위기를 폐지 쪽으로 모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개정론자였던 안영근(安泳根) 의원마저 7일 MBC 라디오에 출연해 “(국보법 폐지가) 당론이면 따라줘야 한다”며 “당론이 폐지로 결정되더라도 우리의 개정론이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그동안 폐지론과 개정론 사이에서 당론조정을 모색했던 당 지도부도 폐지 쪽으로 결심을 굳힌 상황이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마다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서 한쪽 편의 손을 들어주는 현상이 반복되면서 당내의 부정적인 시각도 커지고 있다. 당내 자율적인 논의 구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발언으로 이 같은 과정 자체가 왜곡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내 폐지론자와 개정론자들은 8일 각각 모임을 갖고 의견 조율에 돌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현재 분위기는 개정론자들이 급속히 힘이 빠지면서 폐지론 쪽으로 자동 정리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당정분리의 원칙 속에서 당이 총선 이후 견지하려 했던 ‘당 견인론’과도 거리가 멀어 보인다.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문제로 당정간에 이견이 불거졌을 때만 해도 당의 기세는 등등했다. 노 대통령이 “분양원가 공개만이 개혁은 아니다”고 제동을 걸었지만 당은 ‘총선 공약’임을 내세워 이를 관철시켰다.

국보법 문제는 물론 사안이 다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민감한 현안에 대해 직설적인 화법으로 의지를 밝히면서 당이 위축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노 대통령의 8·15 경축사가 과거사 진상 규명에 대한 당내 회의론을 잠재웠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 총액출자제한제도에 대한 당 일각의 폐지론도 노 대통령의 한마디로 잠복한 상황이다.

당의 한 핵심당직자는 7일 “노 대통령의 발언으로 당이 어렵게 됐다. 가만히 있어도 해결될 수 있었는데…”라고 아쉬워했다. 몇몇 소장파 의원들도 국보법 폐지에 탄력이 붙은 것은 다행이지만 이 과정에서 당이 모양을 구기게 된 데 대해서는 안타깝다는 반응이다.

윤영찬기자 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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