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철칼럼]‘과거 들추기’ 뭘 노리는가

  • 입력 2004년 8월 4일 18시 56분


코멘트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주 과거사에 대한 ‘총진군령’을 내렸다. ‘쟁점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국가적 사업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간첩과 빨치산 경력을 민주화운동으로 판정해 사회적 논란을 불렀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할 생각 없다’는 입장을 밝힌 자리에서였다. 이쯤 되면 대통령의 심중은 분명해졌다. 총진군령이 떨어진지 불과 이틀 만에 열린우리당은 ‘진실 화해 미래위원회’란 것을 들고 나왔다가 보류했다. 신속함도 놀랍고, 급제동 모습도 기막히다. 켜켜이 쌓인 역사의 엄중함과 이를 대하는 집권세력의 가벼움이 한눈에 대비된다. 여하튼 집권세력과 시민단체로 위장한 외곽조직들이 얼마나 목소리를 높일지 뻔하다. 100년 전 과거를 들쑤시겠다면서 거기서 무슨 화해와 미래를 찾겠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역사를 재단하려는 정치권력의 오만 아닌가. 결과도 뻔하다. 한국사회는 100년 전으로 돌아가는 ‘내전’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한 세기 앞을 대비해야 할 시점에 시계는 반대로 한 세기 전으로 돌아갔다. 지금 중요한 것은 몇몇 돌출상황이 아니다. 그 속에 깔려 있는 음습한 밑그림을 제대로 읽는 일이다.

▼드러나는 혁명의 고리▼

지금 집권세력이 열을 올리고 있는 갖가지 ‘과거 들추기’에는 그들도 밖으로 내놓고 말하기가 껄끄러운 함의(含意)가 있다. 나는 그것을 ‘뿌리 자르기’라고 본다. ‘규명’이란 말로 포장은 했지만 실인즉,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지탱해 온 기존체제를 흔들겠다는 의도라는 말이다. 광복 후 극심한 혼란을 이겨내면서 6·25전쟁, 군사쿠데타, 민주화혁명을 거치는 역사의 험난한 부침 속에서 저마다 땀 흘려 일해서 이룩한 것이 지금의 자유민주주의요, 시장경제 아닌가. 그것이 우리의 기존질서요, ‘사회적 축적’이다. 그런데 그것을 개혁이니, 규명이니 하면서 흔들겠다는 것은 사회 뿌리를 잘라버리겠다는 발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대선 승리 후 집권세력이 외쳤던 ‘사회 기존주류세력을 확 바꿔버리겠다’는 혁명구호다. 나는 집권세력의 이러한 목표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주변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실행에 나서지 못했지만 국회 다수당이 된 이제는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을 법하다. 잇달아 쏟아지는 별의별 ‘과거 들추기’를 보면 ‘규명’이란 포장 속에 숨은 ‘혁명’의 은밀한 고리를 살필 수 있지 않은가. 더욱 국정난조로 정권에 대한 평가가 최저치에 이르렀고 이대로는 2007년 대통령선거의 승산이 없다는 데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과거 규명이란 명분을 앞세워 기존세력을 몰아붙인다면 ‘지난 대선 때처럼 똘똘 뭉칠 수 있다’는 ‘분열편집증’에 빠진 것 아닌가. 그런데 앉아서 뿌리가 잘려야 하는 사람을 한줌 소수로 얕보지 말라. 정권의 지지도 하락이 엄연히 입증해 준다. 물어보자. 혁명하겠다는 사람들 뿌리는 무엇인가. ‘유신헌법 고시공부가 부끄럽다’는 한마디로 뿌리가 달라졌다고 믿는가.

▼‘친북좌경’이냐, 아니냐▼

정작 ‘뿌리 자르기’의 문제는 기존체제를 무너뜨리고 난 후 어떤 체제를 세우겠다는 것이냐에 있다. 정권의 ‘정체성’ 문제가 나오는 이유다. 건국 60주년을 맞는 2008년에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체제를 청산하자는 섬뜩한 주장이 나도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판에 야당의 정체성질문을 ‘유신독재 잣대의 색깔론 공세’라면서 비켜가려는 것은 얼마나 척박한 논리인가. 다시 말하지만 심각해진 나라의 앞날을 묻는 정체성 추궁은 아무 때나 둘러대는 색깔론이 아니다. 대통령은 ‘헌법이 내 사상’이라고 답했지만 탄핵기각 결정 때 헌재로부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하라’는 쓴 말을 들은 사람이 바로 대통령이다.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가. 정체성 문제가 나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마디로 ‘친북 좌경정권’이냐, 아니냐다. 친북 좌경 여부를 답하면 된다. 왜 못하는가. 하기야 더 이상 물을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시곗바늘은 되돌아갔고 민심은 이리 갈리고 저리 찢겼다. 정권의 오만이 빚어낸 결과다. 혁명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