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탄핵 기각, 이제 새롭게 시작하자

  • 입력 2004년 5월 14일 18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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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청구가 헌법재판소에 의해 기각됐다. 노 대통령은 곧바로 직무에 복귀했지만 이번 사건이 주는 교훈은 크고도 깊다. 우려됐던 국정 공백이나 혼란이 발생하지 않아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 단계 성숙했음을 보여줬다는 역설적인 평가도 없지 않지만 일어나지 않아도 좋았을 사건이었다.

▼‘헌재의 질타’▼

국회의 소추권 남용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국가 최고통치자의 인식과 행태가 좀 더 진중했더라면 국민은 민생고에 국정 불안까지 겹치는 이중고를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헌재는 노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결정 폄훼 발언, 재신임 국민투표 발언이 모두 법과 헌법에 위배됐다고 결정했다. 다만 헌재는 이런 위법 행위들이 파면의 사유가 될 만큼 중대하지는 않다고 판단했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파면함으로써 직무수행의 단절과 이에 따를 국가적 손실을 감수해도 좋을 만큼 심각한 위법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탄핵을 주도한 야당도 상응하는 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은 옳다. 더욱이 정략적 의도를 갖고 무리하게 탄핵을 밀어붙인 것이라면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렇다고 노 대통령의 책임까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경위야 어떻든 탄핵의 1차적 원인제공자는 대통령 자신이기 때문이다. 3월 선관위가 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선거법 위반 결정을 내렸을 때 절대 다수의 국민은 대통령이 사과하기를 바랐다. 그때 사과만 했어도 탄핵까지 가지는 않을 상황이었다.

노 대통령이 가장 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은 헌법과 법률을 경시하고 위반한 언행에 대한 헌재의 질타이다. 대통령은 법치국가를 실현하고 자유 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헌법적 의무를 지닌다.

▼‘재신임 부채’ 입장 명확히 해야▼

그런 대통령이 법을 경시한다면 우리 사회의 준법정신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이런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취임 이후 사회 곳곳에서 “법치가 무너지고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높다.

헌재의 결정문은 또한 노 대통령의 재신임 국민투표 발언에 대해서도 헌법수호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못 박았다. 이 점에 대해서도 대통령은 사과해야 한다. 헌법과 법이 허용하고 있지도 않은 재신임 국민투표로 그동안 국민을 얼마나 불안하게 했는가. 노 대통령은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태도 표명을 미루고 있다. 이제는 정리해야 한다.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사과하고, 국정에 헌신함으로써 ‘재신임 부채’를 갚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대통령이든 여든 야든 모두 털고 가야 한다. 다시 이 문제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해서는 안된다.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 국민의 하루하루 삶은 고단하기만 한데 언제까지 탄핵 정치에 빠져 있을 것인가. 대통령부터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 모든 혼란과 갈등이 결국은 최고통치자의 리더십 부재(不在), 방만한 언행의 결과가 아닌가. 탄핵이라는 홍역을 치르고서도 대통령이 이를 깨닫지 못한다면 정녕 나라의 미래는 없다. 업무와 책임의 과감한 분산을 통해 대통령의 언행이 국정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역시 경제와 민생부터 챙겨야 한다. 유가(油價)와 원자재 값은 뛰고, 설비투자는 제자리걸음이고, 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나는데 이보다 더 화급을 다투는 국정과제가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개혁도 먹고 사는 문제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기각 결정 면죄부 아니다▼

물론 개혁도 해야 한다. 그러나 제대로 하려면 개혁 목표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구하고 이에 따른 구체적인 개혁 프로그램부터 준비해야 한다. 합의도, 프로그램도, 우선순위도 안 돼 있으면서 청와대, 당, 정부를 가리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개혁구호에 국민은 지쳐 있다. 개혁이라는 것이 도대체 아파트로 치면 재건축을 하자는 것인지, 리모델링을 하자는 것인지 국민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국민은 개혁의 실험 대상이 아니다.

헌재의 기각 결정은 노 대통령에 대한 면죄부가 아니다. 법을 지키고 국민을 네 편, 내 편으로 나누지 말고 함께 모아서 국가발전에 매진하라는 주문이다. 국민은 ‘노사모’의 대통령이 아닌 ‘국민의 대통령’을 보고 싶어 한다. 탄핵 사건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노 대통령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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