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영희/무엇이 善이고 무엇이 惡인가

  • 입력 2004년 3월 18일 19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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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혼란스럽고 불안한 정국에 대해 가급적이면 가만히 지켜보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가는 형세가 예견했던 것보다 더 심해지는 것 같고, 침묵만 하는 것이 부끄러운 지식인의 행태로 여겨져 한마디 하기로 결심했다.

여당 정치인들이 이번 탄핵 결의에 대해 ‘의회 쿠데타’ 또는 ‘후안무치한 날강도 짓’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그런 말을 거침없이 하거나 한술 더 떠서 ‘악한 무리’를 구축(驅逐)하기 위해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서야 한다고까지 선동하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탄핵정국 무서운 이분법만 횡행 ▼

우리가 가장 경계하고 위험시해야 할 것은 세상을 ‘선과 악’으로 양분하고, 자신은 선이 되어 남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없애려는 태도다. 이런 작태는 공산주의자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었지만, 놀랍게도 민주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적지 않게 나타난다. 이런 심성이 어떤 계기에 충동적으로 집단화하면, 그 사회는 이미 이성이 통하지 않는 ‘광기의 사회’로 변해버린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런 위험스러운 분위기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지 크게 염려된다.

나는 원래 탄핵을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으며, 솔직히 특별한 관심도 갖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지금 견해를 밝혀야 한다면 탄핵에 찬성하는 입장에 더 기울어져 있다.

탄핵반대론의 중요한 논거는 이렇다. 첫째,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함부로 탄핵할 수 있는가. 둘째, 별것 아닌 사유를 갖고 탄핵할 수 있는가. 셋째, 도덕적으로 훨씬 더 나쁜 무리들이 그들보다 훨씬 덜 나쁜, 아니 의로운 대통령을 감히 탄핵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첫째, 국회의원도 국민이 뽑은 사람들이며, 탄핵은 대통령 견제수단으로 국회에 부여된 헌법상의 권한이다. 둘째, 우리가 보기에 참으로 별것 아닌 사유(예를 들어 여비서와의 약간의 부적절한 행위 및 이에 대한 거짓말)를 갖고 탄핵이 진지하게 다루어진 외국의 예도 있다. 이번 사유가 중요한지 아닌지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셋째, 지금까지 드러난 바에 의하면 노무현 대통령도 대선 때 엄청난 거액의 불법자금을 사용한 게 분명하며, 따라서 그 점에서는 전혀 의롭지 못하다. 그리고 국회의원들은 자신의 선거에서 대선보다는 훨씬 적은 불법자금을 썼을 것인 만큼, 대선후보보다 오히려 도덕적으로 덜 나쁘다고 해야 한다.

나는 오늘의 사태를 존립 위기를 맞은 야당이 자신을 그렇게 만든 대통령에 대해 힘겨루기를 한 것이라기보다 대통령과 국회의 헌법상 정치권력구도의 제자리잡기 과정에서 나온 정치적 진통으로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에서 나는 분명코 대통령의 실질적 지위 및 권력이 더 약화되어야 한국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 발전할 것으로 생각한다.

▼대통령-국회 제자리잡기 과정 ▼

우리나라는 이제 대통령선거에서 상대방보다 ‘100분의 1’ 정도라도 불법을 하면 당선이 인정되지 않는 나라, 대통령이 대통령답지 못한 언행을 경솔히 해도 탄핵사유가 될 수 있는 나라, 대통령이 ‘한심한’ 국회의원일지라도 무시하지 않고 다독거리면서 통합의 정치를 펴는 나라, 그리고 국민이 특정 정당에 압도적 다수의석을 몰아주어 화를 자초하지 않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세계에서 존경받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흥분된 감성을 식히고 헌재의 결정을 차분히 지켜보자. 어떤 판결이 나오든 너무 비감 격분하거나 ‘깽판’을 치지 말고, 그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따라야 할 최선의 이성적 결정이라고 믿고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해 나가는 성숙함을 보이자. 지식인들이 나서서 선도해야 할 일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 아닐까.

이영희 인하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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