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도덕 불감증’… 권한남용 논란

  • 입력 2004년 1월 29일 2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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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이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외교통상부의 갈등 양상을 보도한 국민일보 기자의 휴대전화 통화기록을 조회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 파장이 커질 조짐이다.

청와대와 NSC측은 “국정원에 보안 유출이 있었는지를 확인해 달라고 했을 뿐 통화기록 조회를 요청한 사실은 없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이를 그대로 믿기엔 석연치 않은 대목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보안사고’인가=국민일보가 6일자로 보도한 문제의 기사는 △미국 방문단의 북한 영변 시찰에 대한 외교부와 NSC의 상반된 평가 △이란 대지진 관련 조전(弔電) 발송 지연 경위 △탈북 귀환포로 귀환 경위 등을 다뤘다. 어느 정도 알려진 내용이라 국가안보와 관련된 기밀이 누설됐다고 보기는 어려운 기사였다.

국정원도 29일 내놓은 보도자료에서 “기사 내용에 외교기밀 내용의 누설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해 (조사를) 종결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NSC는 이 기사에 대해 “외교 비밀 내용이 유출된 것 같다”고 국정원에 조사를 의뢰하는 과민한 반응을 보였었다. NSC측은 문제의 기사에 외교부 쪽의 입장이 많이 반영된 것에 격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에는 현 정부 출범 이후 NSC와 외교부의 뿌리 깊은 갈등이 표출된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통화기록 조회는 적법했나=국정원은 국민일보 기자의 휴대전화 통화기록을 조회한 것은 통신비밀보호법 13조 2항에 근거해 적법한 절차를 밟았다고 밝히고 있다.

통신비밀보호법 13조 2항은 정보기관이 통화기록을 조회할 경우 ‘국가안전보장에 대한 위해 방지’라는 목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NSC와 외교부의 갈등 문제를 다룬 언론보도를 두고 ‘국가안보 위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따라서 국정원이 통화기록까지 조회한 것은 결국 취재원을 밝혀내려 했던 게 아니냐는 추론이 가능하다. NSC측이 보안사고를 이유로 조사를 의뢰한 것도 같은 이유일 가능성이 있다.

▽민정수석실의 외교부 간부 조사경위 의혹=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실은 국민일보 보도경위와 관련해 NSC측의 의뢰에 따라 위성락(魏聖洛) 당시 외교부 북미국장과 이혁(李赫) 장관보좌관을 조사했다.

두 사람은 문제의 기사가 보도되기 전날 국민일보 기자와 전화통화를 했다고 한다. 따라서 수많은 외교부 관리 중 유독 두 사람만이 조사대상으로 지목된 것은 국정원의 통화기록 조회 내용이 민정수석실로 넘겨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하고 있다.

더욱이 사건 당시 이종석(李鍾奭) NSC 사무차장은 “발설 혐의자를 압축해서 민정수석실에 조사를 의뢰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물론 NSC측은 “통화기록을 조사해서가 아니라 자체 탐문조사를 통해 발설자를 압축했던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청와대도 “국정원에서 통화기록 조회 내용을 전달받은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과정을 거쳐 국민일보 기자와 통화한 두 사람이 지목됐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은 내놓지 않고 있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외교부-NSC 사사건건 충돌’ 보도에 청와대 “취재원 찾아라” 조사 착수

국가정보원의 통화기록 조회논란은 국민일보 조수진 기자의 1월 6일자 ‘외교부와 NSC 사사건건 충돌’이란 제목의 기사가 발단이 됐다. 청와대는 이 기사가 나가자 즉시 ‘취재원’ 색출에 나섰고 국정원에 보안조사를 요청했다.

국정원은 SK텔레콤으로부터 조 기자의 휴대전화 통화 기록을 받아갔다. 대통령민정수석실은 국정원이 8일 ‘보안사고 조사대상이 아니다’고 통보한 직후 당시 위성락 외교통상부 북미국장, 이혁 장관보좌관을 소환해 조 기자와 나눈 통화 내용에 관해 조사했다.

조 기자는 12일 ‘청와대의 기자통화내용 조사’ 의혹을 제기했다. 조 기자는 “청와대 조사 직후 북미국장, 장관보좌관과 통화했다. 이들에 따르면 청와대는 기자와의 통화시간까지 파악하고 있었다”며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메모를 외교부 기자실에 돌렸다.

그러나 청와대는 “기자의 통화 기록은 조사하지 않았다”고 반박했고, 국정원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위 전 북미국장은 29일 밤 기자들에게 “민정수석실이 통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믿을 만한 느낌을 받지 않았다”고 조 기자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위 전 국장은 최근 단행된 외교부 인사에 따라 NSC로 파견근무가 예정돼 있다.

한편 한나라당 권영세(權寧世) 의원이 공개한 국정원의 부적절한 대응도 도마에 올랐다. 국정원은 이달 중순 권 의원이 통화 기록 조사에 착수한 사실을 파악한 뒤 전화를 먼저 걸어와 “조사한 적 없다”고 부인했다는 것이다. 또 권 의원은 “SK텔레콤측에 통화 내용 조회사실을 확인한 뒤 국정원 관계자가 ‘2월 임시국회에서 문제제기하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했었다”고 전했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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