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 본사 사장 “한국은 왜 北核에 둔감한가”

  • 입력 2003년 10월 21일 18시 32분


코멘트
필자는 최근 이스탄불에서 열린 세계정치학회(IPSA) 집행위원회와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러포럼에 참석한 뒤 도쿄의 일본기자클럽에서 ‘한반도의 최근정세’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는 기회를 가졌다. 중동 유럽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고도(古都)들에 속하는 이 도시들을 순방하면서 필자는 세계정세가 국가이익의 치열한 대결과 충돌 속에서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다시 실감했다.

이스탄불에서는 역시 이웃 이라크에서의 전쟁이 정치적 토론의 중심을 차지했다. 더구나 터키의회가 파병을 결정한 데 대한 항의의 표시인 듯, 이라크의 후세인 지지자들이 바그다드주재 터키대사관에 자살테러를 감행한 직후여서 화제는 온통 이 전쟁에 쏠려있었다. 파병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이것 봐라. 우리가 예견했던 대로 터키에 대한 보복이 시작되지 않았느냐. 이 참사가 터키 본국에서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 비도덕적인 파병결정을 취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파병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파병의 대가로 들어올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원조, 그리고 이라크재건사업 참여를 통한 실리를 결코 버릴 수 없다”고 거세게 반론했다.

모스크바에서도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흐름이 높았다. 푸틴정부가 사안에 따라서는 미국에 대해 도전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지만, 지난 3년반 넘는 세월에 걸쳐 대체로 친미적 외교노선을 밟아오면서 여러 방면에서 실리를 얻은 경험이 러시아국민들로 하여금 이 전쟁에서도 부시행정부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유리하다는 계산으로 기울게 한 것 같다.

도쿄의 친미적 노선은 어느 다른 나라들에서보다 뚜렷했다. 필자가 모스크바로부터 도쿄에 도착한 그날과 다음날의 언론매체들은 고이즈미총리가 부시와 함께 뜨겁게 악수하며 이라크전쟁에 대해 두 나라가 공동보조를 취할 것을 다짐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면서 자위대의 파병을 당연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크게 반기는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부시의 전쟁정책에 대한 확실한 지지를 통해 일본이 많은 실익을 거둘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 나라가 모두 실리의 꿈에만 젖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라크전쟁이 제2의 베트남전쟁처럼 참전국들을, 특히 미국을 점점 깊은 늪 속으로 끌어당길 것이라는, 그리고 후세인세력과 알 카에다가 중심이 돼 미국 및 다른 참전국들을 상대로 테러를 확산시킬 것이라는 우려를 떨쳐버리지 않고 있었다. 특히 미국의 1극적 패권주의에 대한 반감을 주저없이 드러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 나라들 모두에서 이라크전쟁에 못지않게 북한의 핵개발이 또 하나의 커다란 국제적 걱정거리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우려는 “북한의 핵개발이 대단히 위험스러운 수준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경고하는데도, 어째서 한국은 마치 먼 동네에서 일어난 불 얘기를 하듯 방관자적인 대응을 보여주는가”라는 한 일본 유력일간지 기자의 질문 속에 압축됐다.

필자는 한국이 세계의 다른 모든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가장 효과적인 외교적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필자가 이 일련의 회의에서 만난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한국의 둔감(鈍感)’에 의아심을 나타냈다. 더구나 “북한이 핵무기를 갖는다는 것은 결국 한민족이 핵무기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뭐 그리 소란스럽게 구느냐”는 한국사회 일각의 반응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했다. 북한의 핵개발을 민족 또는 민족주의의 이름아래 사실상 묵인하는 것 같은 일부 젊은이들의 시각은 핵무기에 대한 무지의 수준을 넘어서 대단히 위험스럽다는 지적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러시아의 한 저명한 원로교수가 회의장에서 던진 발언이 인상적이었다.“북한의 극소수 통치자들은 자기 인민들을 감옥의 죄수들처럼 다루고 있다. 남한은 어째서 그 참담한 현실에는 눈을 감고 극소수 통치자들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끔 그들에게 미화를 갖다 주는가. 그것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정반대로 보고 있다”고 이 노학자는 절규하다시피 말했다.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해법은 없는가? 해법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 여러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을 포함한 주변의 유관국들이 북한의 국가적 존속과 체제적 안전을 보장해주는 국제적 조건아래 북한은 핵개발을 전면적이며 불가역적으로 포기하는 “동시적 교환의 방식”으로 귀결됐다. 이러한 점에서, 20일에 채택된 한미정상간의 공동발표문은 위기의 해결에 한 걸음 더 접근한 문서였다고 하겠다. 그래도 여전히 조심스러워진다. “여러 많은 선행조건들이 약속된다고 해서 김정일정권이 핵개발을 완전히 포기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영 가시지 않는다는 뜻이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