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임채정/ ‘대통령의 亂’

  • 입력 2003년 10월 15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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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부조리와 모순이 임계점을 벗어나면 난(亂)을 부른다. 도탄에 허덕이는 민초들이 들고일어서면 민란(民亂)이 된다. 그 대상은 물론 무도하고 부패한 권력이다. 반대로 권력집단의 일부가 난을 일으킨 사례도 많다. 대개 민생과는 무관한, 더러운 권력 암투의 산물이기에 반란(反亂)으로 불린다. 그래서 성공한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 언제부터인가 국민투표가 동원되곤 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던진 재신임 카드로 촉발된 작금의 대혼란은 성격이 복잡하다. 최고 권력자 스스로 “(재신임 받을 때까지) 모든 권력 수단을 포기한다”고 선언한 만큼 그 출발점이 독점적 권력 확보를 위한 친위 쿠데타라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절박한 상황에서의 필사적인 도박’이라는 외신들의 분석이 일단 그럴듯하다. 혹자는 “현 정부엔 누수될 권력도 없다”고까지 말하지 않았는가.

아직은 그냥 ‘대통령의 난’ 정도가 적절할 것 같다. 그러나 각종 여론조사에서 재신임 의견이 우세하게 나오자 위험스러운 변색과 변질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자신의 도덕적 자부심 회복을 재신임 명분으로 내세웠던 노 대통령이 하루 만에 야당과 일부 언론으로 국정혼란의 책임소재를 확장한 것부터가 그렇다. 야당의 요구를 수용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위헌 시비가 있는 국민투표의 조기 실시를 전격 제안한 것도 정략적 계산이 앞선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이 재신임을 묻겠다고 밝힌 직후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에 친필 서한을 보낸 것도 불길한 우려를 자아낸다. 당장 ‘노무현 홍위병’을 자처하면서 노사모에 복귀한 명계남씨가 ‘12월까지 또박또박 악랄하게 전진할 것’을 다짐하고 촉구한 것에선 한기마저 느껴진다. 우리 사회의 보혁(保革)갈등이 지금보다도 심화되면 어찌될까. ‘민란’이라는 말이 그리 멀지 않게 다가온다.

노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과 재신임률의 변화 추이가 함께 그려진 가위모양의 그래프에서 재신임 찬반정국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다. 30%대의 지지율과 50%대를 웃도는 재신임률의 격차는 그대로 앞으로의 정국 불안을 가늠하는 지수다. 지지가 뒷받침되지 않는 신임은 모래 위에 세워진 집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정치 인플레이션 갭’이라고 명명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이 같은 지지율과 재신임률의 격차는 노 대통령에 대한 우리 사회의 총체적 불신의 크기일 수도 있다. 노 대통령에게 어쩔 수 없이 다시 한번 기회를 주기는 하겠지만 지지하지는 않겠다는 것은 얼마나 준엄한 경고인가. 선거만 끝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유권자를 잊고 민의를 저버리는 정치권 전체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다.

그것이 노 대통령과 청와대가 지지율보다 높은 재신임률에 그저 기뻐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노 대통령이 재신임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지지 회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므로 오히려 경계해야 마땅하다. 재신임과 상관없이 지지율이 답보 상태라면 노 대통령은 앞으로 더 큰 부담을 안게 될 가능성이 크다.

노 대통령의 재신임 카드는 마지막 카드다. 다음 카드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임채정 편집국 부국장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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