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현인택/북한, 차가운 머리로 보자

  • 입력 2003년 9월 4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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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끝난 6자회담에 대한 국제적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북한 매체들은 3일 한 가지 ‘중대뉴스’를 발표했다.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김정일이 국방위원장으로 재추대됐다는 소식이었다.

‘김정일 체제 제2기’가 출범한 것이다. 이로써 김정일 정권은 현대 세계사에서 부자세습으로 유지되는 가장 오래된 정권이라는 희귀한 기록을 남기게 됐다.

이는 예정됐던 일인 만큼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북한의 체제변화가 거론되고 있는 최근의 국제 상황에 비춰 북한의 향후 선택과 우리의 대응 방향은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군부 결집시킨 ‘2期 김정일 체제’ ▼

북한은 일단 군부를 확고히 결집시켜 체제를 다시 추스르며, 핵문제로 인한 대결 국면에서 혹시 나타날지도 모르는 정치적 취약성의 노출을 경계하고자 할 것이다.

물론 상식적으로 보면 북한은 이미 실패한 국가다. 외부의 식량원조가 아니면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없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것이 한두 해도 아니고 이미 7, 8년 지속되고 있으며, 앞으로 특별히 나아질 기미도 없다. 이런 실패 국가가 지금 핵카드를 마음껏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을 포함해 내로라하는 강대국들이 이 핵게임에 줄줄이 매달려 있다.

북한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아주 자명한 결론부터 말하자면 북한은 ‘핵도박’이 아니라 ‘개혁도박’을 해야만 살 길이 열린다. ‘핵 억지력을 갖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는 식으로 국제사회를 겁박(劫迫)하는 것은 북한이 지금 겪고 있는 참담한 실패를 해결하는 길이 될 수 없다.

북한이 설령 핵을 가진다 한들 그게 미국에 대해 실질적인 핵 억지력으로 작용할 수 있겠는가. 또 중국이나 러시아의 핵에 대한 억지력이 되겠는가. 중국은 오히려 북한의 ‘핵 장난’을 그냥 놔둘 것 같지 않을 태세다. 결국 그것이 문제가 되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그렇다면 북한이 그렇게 소리 높여 외치는 ‘민족공조’는 도대체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인가. 또 북한의 주장대로 미국과 불가침협정이 체결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북한이 지금의 경제파탄을 해결할 수 없다. 진정한 개혁·개방이 없다면 북한의 미래는 없다. 그것에 모험을 거는 과감한 시도만이 북한이 살 길이다. 그 길만이 한국이 살 길이기도 하다.

북한이 이런 상황을 우회할 수 있는 ‘제3의 길’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어려운 길을 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남북 사이의 ‘코드 맞추기‘ 작업을 통해 남쪽으로부터 끊임없이 수혈을 받아 왔고 지금도 받고 있는 상황 자체가 북한에는 혹시 제3의 길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북한을 볼 때에 보다 냉정한 시각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한국사회의 이념적 건강성을 그렇게까지 의심하느냐고 비난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도의 정치적 입장으로 훈련된 북한 미녀들의 미소를 ‘순수미소’로 미화하고, 그것도 모자라 “장군님 품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애써 애교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다.

▼ 南南갈등으론 北核대처 불가능 ▼

이런 사회 기반을 갖고서는 북한 핵 문제에 제대로 대처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내치의 연장이 외교’라 했다. 국내적으로 강력한 컨센서스를 이뤄야 외교에서도 국가이익을 지켜낼 수 있다. 핵은 안 된다는 국민적 합의를 가지고 북한에 대해 해답을 내놓으라고 할 때만 그것이 먹혀들어 간다.

미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한미 공조에 대한 국내의 합의기반이 흐트러진 상태에서는 상대에게 믿음을 줄 수 없다.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우리 정부가 보여준 적극적 공조 의지가 일회용 제스처가 아니라면 국내적으로 탄탄한 합의를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정부에선 그러한 노력이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에 그들의 벼랑 끝 전술이 성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고 있지는 않는가 심각하게 자성해봐야 한다.

현인택 고려대 교수·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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