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심규선/盧대통령 일본에서의 試驗

  • 입력 2003년 6월 1일 18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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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이맘때 도쿄(東京) 특파원으로 있을 때다. 한국을 다녀온 한 일본인 지인의 말을 듣고 박장대소를 한 적이 있다. 그때는 한일 두 나라가 온통 월드컵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한국말을 몰랐지만 한국인의 피를 끓게 했던 ‘대∼한민국’과 ‘오! 필승 코리아’의 구호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했다. 그는 “‘대∼한민국’은 감으로 알아듣겠는데 ‘오! 필승 코리아’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면서 “처음에는 ‘오! 미스 코리아’라고 외치는 것 같아 이상했다”고 말해 웃음이 터졌다.

당시 ‘코리아-저팬’은 하나의 단어처럼 쓰였다. 너나 할 것 없이 양국의 우정과 교류, 역사의 극복과 동반자 관계를 얘기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바뀌었다. 동아일보와 아사히신문의 공동여론조사를 보면 월드컵 직후 한국인 중에서 일본인과 일본문화를, 일본인 중에서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더 친근하게 느끼게 됐다’는 응답이 ‘그렇지 않다’는 대답보다 많았으나 1년이 채 안돼 그 결과는 역전됐다.

그런 변화를 보여주는 것 중의 하나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현충일 방일 논란이다. 아직도 청와대나 정부 일각에서조차 현충일에 일본을 방문하는 것을 문제 삼는 목소리가 있다고 한다. 그날 일본 천황을 만나는 데 대한 거부감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노 대통령도 한때 국빈방문을 실무방문으로 바꾸는 것을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다는 후문이다.

현충일을 방문일로 결정한 것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우리측이 국빈방문을 요구한 이상 천황을 안 만날 수는 없다. 문제가 방문일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문제다. 방일을 일주일도 채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그런 논란을 계속하는 것은 소모적이다. 지금은 일본에 가서 무엇을 요구하고, 어떤 합의를 이끌어낼 것이며, 어떤 비전을 제시할지를 꼼꼼히 준비해야 할 때다.

한일 정상회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한미 정상회담보다 훨씬 떨어진다. 미국보다 ‘일본은 쉬운 상대’라는 생각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일본도 결코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우선 일본은 노 대통령을 잘 모른다. 노 대통령은 첫 일본방문에서 자신의 존재부터 알려야 한다. 그것도 전후세대 첫 대통령으로서 뭔가 새로운 이미지를 각인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한국인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일본인의 금선(琴線)을 자극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논의해야 할 것도 많다. 한미 정상회담의 최대 관심사는 북핵 문제였다. 그러나 한일 정상회담은 다르다. 북핵 문제도 중요하지만 과거사(역사교과서, 야스쿠니신사 참배), 경제(자유무역협정, 무역역조 해소), 문화(일본 대중문화 개방, 관광 촉진), 재일동포의 지위 향상, 인적교류(양국간 비자면제) 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노 대통령은 이 모든 문제에 대해 적절한 언급과 관심을 표시해야 하고, 결과를 이끌어내야 한다.

현실적으로도 일본은 중요하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은 ‘당근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여부는 결국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 여부에 달려 있다. 일본은 상황이 호전되면 북한에 경제지원을 하겠다고 밝힌 유일한 나라다. 그럴 만한 능력도 있다. 북-일 수교교섭의 종착역도 역시 전후배상문제라는 점에서 일본의 경제력은 한반도 안정에 매우 중요한 변수다.

일본은 우리가 만족할 만큼의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 국민의 일반적 정서다.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망언’과 군사대국화 움직임 등이 우리의 자존심과 경계심을 자극한다. 그러나 정상회담은 가장 중요한 외교행위이며, 판단과 행동의 근거는 오로지 국익이 돼야 한다. 노 대통령의 외교적 수완은 선택의 폭이 좁았던 유일 초강대국 미국에서보다 오히려 이번 일본 방문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시험받는다고 할 수 있다.

심규선 정치부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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