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정훈/미국에서의 씁쓸한 뒷맛

  • 입력 2003년 5월 16일 18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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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정상회담 전날인 14일 워싱턴에서 만난 한 외신기자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너무 홀대받는 것 아니냐. 정상회담의 형식을 봐도 그렇고, 사전 협상 과정을 봐도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을 걸어왔다.

“뭔가 이유가 있겠죠”라고 말을 흐렸지만 기분은 찜찜하기만 했다.

이날까지만 해도 워싱턴의 분위기는 영 좋지 않았다. 미 행정부의 강경파들은 “북한 선제공격을 포함한 모든 옵션(all options)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했고 미국의 일부 언론은 이를 인용해 “미국이 노 대통령의 제의를 퇴짜놨다”고 보도했다.

이런 와중에 노 대통령은 “미국은 정의가 승리한 역사를 가진 정말 좋은 나라다”며 찬미(讚美) 발언의 강도를 높여갔고 한미 양국의 실무협상팀 사이에서는 치열한 줄다리기가 계속됐다. ‘모든 옵션’(모든 선택)이라는 표현을 공동성명에 넣느냐 마느냐가 최대의 쟁점이었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군사적 대응’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뜻의 이 두 단어가 공동성명에 들어가는 것은 노 대통령의 방미외교가 완전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정상회담이 열린 15일에 들어서면서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었다. 두 정상이 백악관 정원인 로즈 가든에서 공동회견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정상회담이 시작된 지 10분 만에 미리 배포된 공동성명 문안에는 문제의 단어는 들어있지 않았다.

얼마 후 두 정상이 로즈 가든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과 회견 장면이 CNN을 비롯한 미국 방송에 생중계됐다.

그러나 이번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이 보인 태도는 뻣뻣했다. 한미간 협의의 핵심 파트너인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중동 출장으로 자리를 비웠고 정상회담 협의 과정에서 회담 시간을 15분밖에 낼 수 없다던 미국은 회담 직전 로즈 가든 공동회견을 하겠다고 갑자기 일정을 바꾸기도 했다.

물론 미국이 막판에 보여준 환대로 양국의 우호관계를 확인했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로즈 가든 회견을 하고,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침실이 있는 백악관 2층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10분간이나 직접 안내하며 구경시켜주는 것은 좋다.

그러나 이것이 겉으로만 모양새를 갖춰주는 ‘서비스’에 불과했다면 진정한 동맹관계는 아직 요원하다. 미 언론들은 두 정상간에 깊이 있는 대화는 거의 없었다고 보도했다.

더욱이 미국이 노 대통령의 잇따른 몸 낮추기 발언이 있고 나서야 환대 분위기로 돌아선 것은 한국 국민에게 ‘새로운 파트너 길들이기’로 비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샌프란시스코=김정훈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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