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칼럼]우정, 그 눈물나는 광고

  • 동아일보
  • 입력 2003년 5월 9일 18시 22분


마음에도 권력관계가 존재한다. 좀 약한 사람이, 더 많이 원하는 사람이 먼저 손을 내미는 경향이 있다. “우린 친구 아이가”라는 말도 실은 우정이 돈독할 때보다 상대가 날 위해 뭘 해주길 바랄 때 한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 신문에 낸 영문 광고에는 한글로 ‘우정’이라고 쓴 글씨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우리 대통령이, 사진 찍고 오는 식의 방미는 안 하겠다던 그 자존심 강한 대통령이 지금 미국에 간절히 구하는 것이 다름 아닌 우정이라는 고백에 속이 뭉클했다.
▼같은 기질, 다른 스타일 ▼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내 아들과 노 대통령은 성격이 비슷해 잘 통할 것 같다”고 한 적이 있다.
부시의 기질로 첫손에 꼽히는 게 유머다. 경계심을 무너뜨려 보좌진은 물론 기자들까지 편하게 해준다고 애틀랜틱 먼슬리지는 평했다. 동갑인 노 대통령의 감각도 이에 못지않다. 기자들은 모르겠지만 청와대회의에선 웃음도 터진다는 보도가 있었다.
거친 환경과 싸우며 농업과 유전을 일궈낸 텍사스 카우보이들은 직설적이고 고집스러우며 독립적인 성향이 있다. 노 대통령의 경상도 기질과 은근히 비슷하다.
마흔 안팎에 인생의 전환을 맞은 것도 일치한다. 술독에 빠져 살던 부시 대통령은 1985년 독하게 성경공부를 시작해 이젠 미국을 정교(正敎)일치의 나라로 만든다는 비판까지 듣고 있다. 83년경에 돈만 알던 변호사에서 인권변호사로 거듭난 노 대통령은 어떤 386세대보다 치열한 개혁성향을 지니게 됐다. 내 편이 아니면 제거해야 할 악 또는 잡초로 보는 이분법도 이 영향이 크다.
이렇게 통하는 점이 많으니 첫 회담이 술술 풀리길 기대하는 마음 굴뚝같다. 하지만 부부도 비슷한 사람이 만나면 되레 마찰이 크다고 했다. 기질은 흡사한데 가치관과 스타일이 다르거나 이해관계가 상반될 경우엔 영 틀어질 우려가 없지 않다.
우선 부시 대통령은 예전의 그가 아니다. 집권 초기 우둔하다는 악평까지 들었으나 9·11테러 참사 이후 미국 슈퍼파워의 상징으로 우뚝 섰다.
그의 리더십은 강력한 결단에서 나온다. 미국정치학회의 연구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은 직관과 전략적 사고를 통해 한번 결정을 하고 나면 결코 흔들리는 법이 없다. 어제 한 말과 오늘 말이 달라져 국민을 혼돈시키는 노 대통령과 다르다.
부시 대통령은 각기 “대통령은 내 편”이라고 믿는 매파와 비둘기파를 격렬하게 토론시키되 결론은 자신이 내는 용인술을 쓴다. 탁월한 인간경영이라고 정치학자들이 감탄할 정도다. 주변에 코드가 같은 사람만 앉혀놓고 “나를 놓아달라”고 간청하는 노 대통령과 대조적이다.
부시 대통령이 결단을 내리는 기준은 단 하나, 미국의 국익이다. 미국이 지켜야 할 것엔 미국 영토뿐 아니라 미국의 가치관도 포함된다. 안타깝게도 미국이 외치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다른 나라에서 보는 그것과 똑같지 않다. 인권 못지않게 사유재산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의 화신이 미국이다. 부시팀의 싱크탱크인 네오콘(neo-conservatism·신보수주의)그룹은 자국의 안보와 비즈니스를 위협하는 불량국가의 정권은 갈아 치워야 한다고 믿는다. 미국의 새 이데올로기로 떠오른 이들 네오콘이 극도의 반스탈린주의로 뭉친 데 비해 노 대통령과 운동권 실세팀은 지구상의 독보적 스탈린주의자인 북한 김정일 정권에 ‘퍼주기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것도 큰 차이다.
▼국익 우선해야 진정한 대통령 ▼
한미 정상의 기질과 스타일이 같든 다르든, 개인적으로 우정을 다지든 안 다지든 그건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점은 미국은 한국에 ‘아직은’ 필요한 나라라는 사실이다. 1인당 국민소득은 고작 세계 54위면서 가장 위협적인 북핵과 등을 맞댄 곳이 우리나라 아닌가.
노 대통령이 지난 대선 때의 지지자들이나 다음 총선을 의식해서 예의 거침없는 다변으로 부시 대통령에게 ‘민족자결주의’를 설득하려 한다면 글쎄, 일단 달러라도 바꿔두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정권의 이익 아닌 국익을 생각한다면, 설사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미국과 한목소리를 내고 돌아와야 한다. 노 대통령의 발걸음이 가볍지는 않겠지만 보내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불안을 풀어주지는 못할 망정 더 불안하게 만든다면 ‘대통령 대접’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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