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메시지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DJ를 너무 심하게 공격하지 말라. DJ 입장에서는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되든 마찬가지다. 민주당 사람이 된다고 해서 DJ를 비판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것 아니냐. 앞으로 확실하게 중립을 지킬 테니 한나라당도 DJ의 국정운영에 협조해 달라.”
한나라당은 당시 이 메시지를 ‘수용’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해 12월31일 민주당이 자민련의 교섭단체 구성을 도와주기 위해 ‘의원 꿔주기’를 강행하며 ‘강한 여당’을 겨냥한 정국 드라이브를 걸고 나서자 한나라당은 이에 강력 반발했고, 결국 DJ와 이회창간의 ‘전략적 제휴’ 구상은 유야무야됐다.
그러나 비록 불발에 그쳤음에도 야인 입장이던 박지원이 대야(對野) 접촉의 창구이자 메신저 역할까지 했음을 보여주는 이 일화는 그의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뒷받침하는 셈이다. 박지원은 실제로 문화부 장관직을 물러난 뒤에도 수시로 청와대 관저를 드나들며 DJ를 독대했다.
2002년 8월. 한나라당 이재오(李在五) 의원은 의원총회에서 “박지원 대통령비서실장이 송정호(宋正鎬) 전 법무부 장관에게 ‘이회창을 죽이는 데는 병풍밖에 없다. (당신이) 맡아서 하라’고 했으나 송 장관이 ‘못하겠다. 문제가 된다’고 버텼다”며 “이 때문에 송 장관은 임명 6개월도 안 돼 경질됐다”고 폭로했다.
이재오의 폭로는 송정호의 최측근 인사가 제보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 익명을 요구한 이 제보자는 “2002년 1월 개각 때 법무부 장관에 기용된 송정호가 임명장을 받으러 청와대에 갔을 때 박지원이 별도로 보자고 해 병풍수사에 착수할 것을 지시했으나 송정호가 이를 거부했다”고 구체적 정황을 제보했다.
이에 대해 송정호는 “박지원과 대통령 아들 문제에 대해 얘기를 하긴 했지만 병풍 수사와 같은 문제는 얘기가 없었다”고 부인했지만,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송정호가 드러내놓고 얘기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진상을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튼 박지원의 영향력은 정치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박지원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대북 비밀접촉의 주역이기도 했다. DJ정부 내내 각종 게이트가 터질 때마다 그의 이름이 단골로 거론됐던 것도 사실은 그가 이처럼 온갖 일에 관여했기 때문이었다.
DJ정부에서 요직을 지낸 한 인사의 술회. “박지원이 대통령정책기획수석비서관직을 사퇴하고 물러나 있던 2002년 1월, 여권 핵심부에서 느닷없이 조기개각론이 불거져 나왔다. 이는 박지원측이 DJ 임기말을 관리하기 위해 강력한 청와대 진용을 갖춰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청와대 복귀를 추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여권 내에서는 특별한 개각 요인이 없다며 반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지만 박지원은 1월 개각을 관철시켰다. 일부 청와대 비서관은 민주당 한화갑(韓和甲) 대표 등을 찾아다니며 내놓고 ‘박지원 복귀’ 운동을 펴기도 했다. 좀 과장하면 ‘없는 개각’도 만들어 낼 만큼 그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셈이다.
이 개각으로 학자 출신이던 이상주(李相周) 대통령비서실장은 교육부총리로 밀려났고, 박지원과 가까운 사이였던 전윤철(田允喆) 공정거래위원장이 비서실장에 기용됐으나 결국 3개월 뒤 박지원은 비서실장 자리에 앉게 된다.
박지원의 인사 개입설은 문화 체육계에서 특히 무성하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2002년 월드컵축구 대회조직위원장 인선을 놓고 박지원은 당내 동교동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몽준(鄭夢準) 의원을 밀었다. 동교동계는 내심 호남 출신인 이연택(李衍澤) 전 총무처 장관을 밀었으나 박지원과 정몽준의 파워에 밀렸다가 뒤늦게야 ‘공동조직위원장’ 형태로 당초 구상을 부분 관철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박지원은 2002년 MBC사장 인선 때도 K씨를 밀었다가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측의 반발로 실패한 일이 있다. 교육방송 사장 인선에선 또 다른 K씨를 미는 등 끊임없이 언론 및 문화계 인사에 개입을 시도했다. 이런 과정에서 간간이 박지원과 동교동계간에 의견 대립이 빚어지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박지원은 알려진 것과 달리 동교동계 인사들과 그리 친하게 지낸 편은 아니다. 대부분의 동교동계 인사들은 “DJ정부에서 동교동계는 욕만 먹었지 장관 한번 제대로 못했다. 그러나 박지원은 DJ정부 5년 동안 안 해본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며 박지원에 대한 불만을 감추지 않는다. 박지원과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로 소문났던 권노갑(權魯甲) 전 민주당 최고위원측도 지금은 “2002년 6월 권노갑이 구속된 배경에 박지원이 있었다”며 노골적으로 섭섭함을 토로하고 있다.
2002년 최규선(崔圭善) 게이트 수사과정에서는 박지원이 포스코 유상부(劉常夫) 회장에게 해태타이거스 야구단 인수를 요구하고 타이거풀스 주식을 고가에 매입하도록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나라당 이인기(李仁基) 의원은 2002년 7월 국회에서 “유 회장이 검찰 진술을 통해 2001년 3월쯤 박지원 당시 대통령정책기획수석비서관으로부터 해태타이거스 야구단 인수를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자 대안으로 타이거풀스 주식을 매입할 것을 요구했다는 말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DJ정부 핵심 관계자는 “박지원을 포함한 여권 핵심 인사들이 유상부에게 타이거스 야구단 인수를 요청했던 것은 맞다. 그러나 유상부는 당시 타이거스 야구단 인수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타이거풀스의 주식을 대신 사주는 것으로 대충 넘어가려 했다. 이에 대해 박지원은 ‘유상부가 적당히 면피만 하려 한다’고 불쾌해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2002년 5월 6일 DJ가 민주당을 탈당하면서 정치불개입을 선언한 이후 박지원의 활동 영역은 ‘비정치권’ 쪽으로 이동하긴 했지만 분주하게 사람을 만나는 것은 여전했다. 박지원은 이따금씩 출입기자들에게 정치권을 제외한 각계 인사들과의 식사 약속 일정이 빼곡히 적힌 자신의 수첩을 보여주기도 했다. 박지원은 DJ임기 말까지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 행위를 하루도 쉬지 않고 한 셈이다.
이같은 정치 활동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과연 그가 어디서 조달했느냐는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 이와 관련해 DJ정부의 한 청와대 출신 인사는 “박지원이 친구들에게 신세를 진 것은 맞다”며 “재미교포 출신으로 70, 80년대 박지원의 미국 생활 시절 친하게 지냈던 L씨가 이따금씩 박지원에게 ‘밥값’을 지원해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여권 인사는 “박지원은 미국에서 사업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인 만큼 어떻게 비자금을 만드는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며 “누구의 뒤를 봐주더라도 직접 돈을 받지 않고 말썽이 나지 않도록 우회적으로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정보통신 관련 사업체를 소유하고 있는 L씨는 ‘한빛은행 게이트’ 청문회를 앞두고 있던 박지원에게 대우재단 빌딩에 있는 자신의 소유 사무실을 빌려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L씨는 또 한나라당 등 구여권 인사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사이로, 정치권에서는 2000년 말 가동됐던 박지원-하순봉 라인도 L씨가 중개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DJ는 朴에 중독"▼
DJ가 자신의 정권 내내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았던 박지원을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 문화관광부장관 대통령정책기획수석 정책특보 비서실장을 맡기며 전폭적으로 신임한 이유는 무엇일까.
DJ정부의 청와대 관계자들은 그 첫 번째 이유로 성실함을 꼽는다. 박지원은 야당시절부터 아무리 술을 많이 먹어도 다음날 새벽 5시30분이면 어김없이 동교동 자택으로 출근, 그날의 신문 보도상황 등을 브리핑할 만큼 부지런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DJ가 ‘박지원 중독증’이라는 얘기가 나올 만큼 그에게 빠진 이유를 ‘성실함’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민주당 인사들은 여야를 넘나들 만큼 능수능란한 박지원 특유의 처세술, 보스의 심기(心氣)를 꿰뚫고 윗사람의 ‘입안의 혀’처럼 움직이는 그의 탁월한 보좌능력에 DJ가 함몰된 측면이 크다고 설명한다.
84년 DJ의 미국망명시절 이뤄진 DJ와 박지원의 첫 대면은 박지원식 처세의 일단을 짐작케 하는 사례다. 미국에서 가발수입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박지원은 81년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의 방미 때 교포환영위원장을 맡는가 하면, 83년에는 뉴욕에서 전경환(全敬煥)씨와 어울려 다니다가 계란세례를 받는 등 오히려 민정당 쪽에 밀착돼 있었다. 반면 그즈음 DJ는 미국 내 인권문제연구소 사무실 유지비가 없어 이를 폐쇄할 만큼 재정적인 압박을 받고 있었다.
84년 양자의 만남을 주선했던 김경재(金景梓) 의원의 설명. “뉴욕의 내 사무실 옆에 가게를 내고 있던 박지원을 찾아가 ‘당신이 전국구를 생각한다는데, 민정당은 돈 걱정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쪽에서는 전국구를 하기 어렵다. DJ에게 충성하는 것이 전국구를 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설득했다. 이런 경위로 박지원은 5000달러를 들고 워싱턴으로 DJ를 찾아갔다. 박지원은 DJ를 보자 즉시 무릎을 꿇고 전경환 건을 해명했다. 그의 싹싹함에 DJ는 쉽게 허물어졌다.”
젊은 시절 사업을 한 때문인지 박지원의 돈 관리는 확실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박지원은 한빛은행 게이트를 비롯해 출신교인 단국대 부지 재개발 사업을 수주한 포스코 임원 조모씨와의 밀착 의혹 등 각종 사건에 연루돼 직간접적으로 조사를 받았으나 대부분 무혐의 처리됐다. 이는 ‘걸릴 돈은 절대 직접 안 받는다’는 철저한 돈관리의 원칙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특별취재팀 명단▼
▽팀장=이동관 정치부 차장
▽정치부=윤승모 차장급기자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승헌 기자
▽경제부=반병희 차장 홍찬선 김동원 박중현 김두영 기자
▽사회부=하종대 이명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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