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對 노무현 1]내 인생의 10대 뉴스

  • 입력 2002년 11월 29일 19시 10분


《12월19일 치러질 제16대 대선의 유력 후보인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를 검증하는 시리즈를 마련한다. 그 첫회로 두 사람이 직접 뽑은 ‘내 인생의 10대 뉴스’를 소개한다.》

▼이회창 후보▼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대통령후보가 꼽은 ‘내 인생의 10대 뉴스’의 첫머리엔 부친 고 이홍규(李弘圭)옹 관련 내용이 올랐다. 검사였던 아버지가 6·25 발발 석 달 전인 50년 3월26일, 사상범 혐의로 전격 구속됐을 때 경기중학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 후보가 받았던 충격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 후보는 “아버지는 당시 충북도지사가 구호물자를 빼돌려 치부한 사건을 끝까지 파헤쳐 결국 유죄 판결을 받게 했다”며 “이 때문에 권력층의 미움을 받아 터무니없는 조작으로 구속된 것”이라고 말했다.

부친은 두 달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그 직후 6·25가 터져 이 후보와 나머지 가족들은 부친을 만나지 못한 채 부산 피란길에 올랐고, 이 후보는 ‘소년가장’이 됐다. 이 후보는 “아버지의 구속과 소년가장 역할, 전쟁의 와중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이웃을 보면서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대접받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꿈을 키웠다”고 회고했다. 부친은 올 10월31일 향년 97세로 별세했다.

이 후보는 2위로 ‘법관의 길’을 꼽았다. 공인(公人)으로서의 소명감을 다시 깨닫게 한 사건이었다는 것. 그는 “우리 사회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선언하는 법관, 그 공인의 길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고 말했다.

3위로 꼽은 부인 한인옥(韓仁玉)씨와의 만남과 결혼은 인연의 소중함을 알게 된 계기였다고 이 후보는 소개했다. 그는 “우리는 62년 첫 만남 뒤 7개월 만에 결혼했다”며 “지금까지도 아내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내 곁을 지켜주고 있다.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고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대쪽 판사’라는 트레이드마크가 붙은 두 차례의 대법관 시절, 89년 서울 영등포을 국회의원 재선거 때 당시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을 비롯한 각 당 총재들에게 불법선거운동을 경고한 서신을 보낸 뒤 중앙선거관리위원장직을 사퇴한 사건을 4위와 5위 뉴스로 선정했다. 이 후보는 유력자들에게 경고서신을 보낸 데 대해 “실정법과 현실의 괴리를 느끼며 공명선거의 경종을 울리고자 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이 후보는 김영삼(金泳三) 정부 시절 감사원장을 맡아 청와대와 국방부의 율곡사업, 안기부 감사까지 이어진 ‘성역 없는 감사’를 한 것은 엄정한 개혁만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줬다며 6위로 꼽았다.

이 후보는 또 ‘재임기간 127일의 국무총리’를 7위로 선정하면서 “권력 분산은 집권 그룹의 힘을 오히려 더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역설의 원리’를 인식시켜줬다”고 말했다. 그가 “집권하면 총리에게 헌법에 보장한 내각 통할권과 각료 제청권을 실질적으로 부여하겠다”고 공약한 것도 그때의 경험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 후보는 96년 1월 정계 입문을 8위로 꼽았다. 그는 “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YS에게서 정계 입문을 제의받았을 때 며칠 동안 잠을 설쳐가며 고민했다”며 “처음엔 솔직히 정치를 할 생각이 없었으나 개혁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나서는 것이 도리라고 판단했다”고 회고했다.

9위로 꼽은 ‘97년 대권 도전 실패’는 그에게 좌절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긴 사건이었다.

이 후보는 이어 “2000년 16대 총선 전 개혁공천은 야당 총재로서 여러 날에 걸친 번민 끝에 내린 결단”이라며 “4·13총선 승리로 원내 과반수를 넘는 1당으로 거듭날 수 있었고, 나라다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며 이를 10위로 제시했다.

정연욱기자 jyw11@donga.com

▼노무현 후보▼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는 고향인 경남 김해 진영의 ‘동네 처녀’였던 권양숙(權良淑)씨와 만나 사랑하고 결혼해 살아가는 것을 ‘인생 10대 뉴스’ 톱뉴스로 꼽았다.

노 후보는 사석에서 종종 “아내의 끊임없는 격려가 없었다면 사법시험에 합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88년 총선 당시 ‘강적 허삼수(許三守)씨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도 아내뿐이었다”고 말했다.

노 후보는 당내 경선 과정에서 장인의 부역 문제로 공격받자 4월5일 대구 경선에서 “평생 가슴에 한을 묻어온 아내가 또 아버지 일로 눈물을 흘려야 합니까. 대통령 되겠다고 아내를 버리면 용서하겠습니까”라고 말해 ‘노풍연가(盧風戀歌)’ 신드롬을 일으켰다.

둘째 뉴스는 국민 경선을 통해 ‘이인제(李仁濟) 대세론’을 꺾고 대통령후보로 당선된 것을 꼽았다. 노 후보는 “당시 광주 경선(3월16일)에서 이기면서 승리를 확신했다”고 말했다.

90년 3당 합당 반대는 노 후보 이름 앞에 ‘원칙과 소신의 정치인’이란 수식어를 붙게 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81년 부림사건(부산지역 재야운동권 20여명이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된 시국 사건)은 노 후보를 ‘돈 잘 버는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로 만들었다. 노 후보는 “79년 부산-마산 항쟁 때만 해도 동료 변호사가 영장 없이 잡혀가 고문을 당해도 귓등으로 흘려 넘겼다”며 “부림사건을 변론하면서 ‘앞으로 비겁하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큰형 영현(英鉉)씨가 73년 5월14일 교통사고로 숨진 일은 노 후보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노 후보는 부산대 법대 출신인 영현씨를 보면서 법조인에 대한 꿈을 키웠고, 영현씨의 정신적 지원 덕분에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학창 세월을 보낼 수 있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노 후보가 부산에서 세 번째로 떨어지자, 자발적인 팬클럽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 탄생했다.

노 후보는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기억’을 7번째 뉴스에 올렸다. 78년 변호사로 갓 개업했을 때 한 중년 여자가 사기 혐의로 구속된 남편의 사건을 의뢰하며 수임료로 60만원을 냈다. 그 여자는 다음날 “피해자와 합의가 됐으니 돈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당시 사정이 어려웠던 노 후보는 “내가 당신 남편 접견까지 다녀왔으니 돌려줄 수 없다”며 딱 잡아뗐다.

노 후보는 94년 발간된 자전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 첫 머리에 이 일화를 소개하며 “그 아주머니가 사무실을 떠나며 내게 던졌던 ‘변호사는 본래 그렇게 해서 먹고삽니까’라는 말은 지금까지도 내 가슴속에서 메아리치고 있다”고 토로했다.

75년 사법시험 합격은 빈농의 아들인 노 후보의 인생을 수직 상승시켰고, 88년 5공 특위 청문회에서 그는 ‘전국적인 스타’가 됐다.

노 후보는 87년 2월7일 ‘박종철(朴鍾哲)군 추모회’를 가진 뒤 연좌농성을 벌인 혐의로 3번이나 구속영장이 청구됐으나 모두 기각됐다.

이 과정에서 검찰이 ‘눈엣가시’격인 노 후보를 구속시키려고 판사의 집에까지 찾아가 무리하게 영장을 청구한 사실이 동아일보 2월11일자 사회면 톱기사로 보도되면서 ‘부산의 노무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노 후보는 같은 해 9월 대우조선 분규 개입 혐의로 끝내 구속됐다.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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