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대선후보 이회창]원칙-대쪽이미지…˝유연성 부족˝ 지적

  • 입력 2002년 5월 9일 18시 32분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는 우리 정치권에서 미증유의 압축성장을 한 ‘정치적 기린아(麒麟兒)’다. 정치 입문 후 6년 남짓밖에 안됐지만 그는 두 차례나 원내 제1당의 대통령후보가 됐다.

이 후보의 정치적 성공은 3김(金)의 대안(代案)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그 밑거름은 법조와 공직생활을 통해 국민에게 각인된 ‘대쪽’ 이미지였다.

▽잦은 전학〓1935년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난 이 후보는 검사였던 부친 이홍규(李弘圭·97)옹의 임지를 따라 전국을 돌아다녔다.

학교도 광주 서석초등학교와 청주중을 거쳐 경기중·고로 옮겨 다닌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가족. 뒷줄 오른쪽부터 차남 수연씨,사위 최명석 변호사,딸 연희씨,장남 정연씨,정연씨 부인.

전학이 잦았던 성장기 이회창을 보여주는 몇 가지 ‘남다른 장면’이 있다. 청주중 1학년 때의 가출사건을 그 첫 장면으로 꼽을 수 있는데, 학기말 수학시험에서 60점 만점에 20점을 받은 게 이유였다고 한다.

그의 자전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원칙’에는 “내 능력으로는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고 적혀 있다.

6·25전쟁 직전 그가 경기중 4학년(지금의 고1) 때 들이닥친 부친의 구속 사건은 아마도 성장기 이회창에게 가장 큰 충격이었던 듯하다. 서울지검 검사였던 부친이 그가 보는 앞에서 ‘남로당원을 무혐의로 풀어줬다’는 이유로 수갑이 채워진 채 연행된 것이다.

그는 훗날 “경기중 4학년에 재학중이던 나는 명륜동 집에서 부친이 검찰 수사관들에 의해 연행되는 것을 봤다”며 “우리집은 갑자기 큰 슬픔에 잠겼고 나는 충격에 빠졌다”고 회고한다. 형 회정(會正·삼성서울병원 병리과장)씨도 “사춘기를 맞은 회창이가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초임 판사 시절 장남 정연씨를 업고 있는 모습.
▽법조인 이회창〓이 후보는 서울대법대 4학년 재학중인 1957년 고시 사법과(8회)에 합격했다. 40년 가까이 이어진 법조인 생활의 시작이었다.

부친은 당시 주미대사였던 장면(張勉) 박사의 도움으로 두 달 만에 풀려났다. 온 가족이 가톨릭에 귀의한 것도 그런 인연 때문이다. 부친이 영세를 받을 때 장 박사가 대부였다. 장 박사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대부이기도 했다.

▽사춘기와 ‘미(美) 판사’〓부친 사건 이후 이회창은 변론반 친구들과 송도 바닷가를 돌아다니며 싸구려 ‘마산 드라이진’을 마시고 울분을 토로하기도 하고, ‘스카라무슈’라는 영화를 보고는 ‘사나이들의 의리’에 감동받아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고 한다.

고3 때는 당시 부산 보수동에서 남녀 대학생의 앞길을 막고 행패를 부리는 동네 불량배들과 ‘활극’을 벌여 코뼈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그는 41년이 지난 94년 국무총리를 물러난 뒤에야 코수술을 받는다).

57년 공군 법무관 입대 후 제2 논산훈련소에서 동료와 포즈를 취한 이후보(왼쪽)

경기중고교 동창인 서병국(徐丙國) 가꾸다상사 대표는 “‘애수’ ‘ 젊은이의 양지’ 같은 명화를 같이 본 적이 많았다”며 “그는 노래를 잘 부르지는 못했지만 감수성이 예민해 ‘별이 빛나건만’ 같은 오페라 아리아를 목청 높여 몇 소절 부르곤 했다”고 말했다.

1962년 인천지법 초임판사 시절, 그는 선배의 소개로 한인옥(韓仁玉) 여사를 만난다. 처음엔 한 여사가 서울고법원장의 딸이라는 점 때문에 부담스러워 했지만 결국 결혼에 골인한다. 당시 에피소드 하나.

인천지원에 첫 발령이 났을 때 그를 두고 지방신문엔 ‘홍안(紅顔)의 미판사’라는 기사가 실린다. 얼굴 혈색이 좋은 미남이라는 것이었다.

▽판결로 말한다〓이 후보는 서울대 법대 4학년 재학중인 1957년 고시 사법과(8회)에 합격했다. 40년 가까이 이어진 법조인의 시작이었다.

그에게 판사의 길을 권한 사람은 홍규옹이었다. 이 후보는 홍규옹이 인생의 나침반이었다고 술회한다.

그가 부장판사 시절 변호사 개업을 준비하다가 “돈 벌려고 판사 했느냐”는 홍규옹의 질책을 받고서 취소한 얘기는 유명한 일화.

97년 대선을 앞두고 서울 시내 포장마차에서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법조인 이회창을 지배한 키워드는 ‘사법적극주의’였다. 자구(字句) 해석에 얽매이지 않는 적극적 법 해석을 강조한 것이다.

그의 신념이 진가를 발휘한 것은 80년대 대법원판사 시절(81년 4월∼86년 4월, 88년 7월∼93년 4월). 신군부가 사법부까지 노골적으로 장악하려 했던 당시 그는 ‘소수의견’ 형식으로 파격적인 법 해석을 시도했다. 그 나름의 저항이었다.

‘대쪽’이라는 트레이드마크가 따라붙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5공시절 대법원판사 재임용에 탈락한 것도 과외수업 금지에 제동을 거는 듯한 소수의견을 냈던 것과 무관치 않았다는 후문이다. 과외수업 금지가 전두환(全斗煥) 정권의 최대 치적으로 치부되던 때였다.

그는 이처럼 ‘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는 원칙에는 철저했으나 판결 이외의 행동에는 소극적이었다. 사법부 사상 최초로 판사들이 정치권력의 간섭에 맞서 들고일어났던 1971년 1차 사법파동 때 ‘판사 이회창’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가 없었다.

▽정치 신데렐라〓그의 정치 행로는 파격 그 자체였다.

중앙선거관리위원장으로 재직하던 89년 당시 그가 동해시와 서울 영등포구 재선거의 혼탁상을 이유로 여당 총재인 노태우(盧泰愚) 대통령과 야당 총재들에게 보낸 ‘경고장 사건’이나, 문민정부 감사원장과 국무총리 시절 보여준 ‘거침없는’ 모습은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신덕현(申德鉉) 당시 감사원장비서실장은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감사위원회의를 위해 700쪽이나 되는 서류를 집에 갖고 가서 판사시절 익힌 속독법으로 다 봤다고 했다”고 전한다

YS가 15대 총선승리를 위해 야인(野人)으로 있던 그를 다시 영입한 것도 이 같은 국민적 인기 때문이었다. 이 후보는 96년 1월 신한국당에 전격 입당, 곧바로 중앙선대위의장을 맡았다. 정계 입문부터가 파격적이었다.

앞으로 7개월여가 지나면 이 후보가 말 그대로 3김 이후의 기린아인지, 아니면 3김의 반사이익을 누린 한때의 행운아에 불과한지 판가름날 것이다.

정연욱기자 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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