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철칼럼]DJ탈당의 비밀

  • 입력 2002년 5월 8일 18시 34분


세 아들 비리의혹에 대한 사과와 함께 남은 임기 동안 국정에 전념하겠다며 김대중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했을 때 솔직히 말해서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현직 대통령이 집권 여당을 떠난다는 것이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미 지친 많은 사람들은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사과·탈당성명을 기획한 일부 집권세력으로서는 기대했던 약효를 얻기 힘들게 됐다. 이번 성명의 핵심은 아들 문제에 대한 사과보다는 탈당에 있다. 간접사과 내용은 새로운 것이 없어 집권세력도 이 부분에선 큰 효과를 생각하지 않은 눈치다. 그보다는 탈당효과를 기대하는 모양인데 이 역시 여러 차례 거론돼 온, 새로운 처방이 아니어서 약발도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오히려 현직 대통령의 집권당 조기 탈당은 앞으로 남은 임기 9개월 동안 예상 밖으로 정치기류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소지를 남겼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떼밀린 탈당선택▼

무엇보다 이번 탈당은 김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원했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사실상 정치적 무장해제 속에 정치인생을 총정리하는 탈당발표를 박지원 대통령비서실장으로 하여금 대독하게 만든 형식도 그렇지만 임기를 9개월이나 남기고 집권 여당을 버린다는 것은 그동안 김 대통령의 정치스타일과도 맞지 않는다. 뭐라 해도 정치적 장악력이 누구보다 강했던 김 대통령 아닌가. 탈당하더라도 좀더 시간이 흐른 뒤 본인이 비장한 표정으로 직접 발표할 때의 효과가 더욱 극적이라는 것을 모를 김 대통령이 아니다. 결국 김 대통령은 아들 비리의혹에 대한 사과 압박에 빌미를 잡힌 상황에서 탈당까지 얹은 성명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기복이 심한 정치역정을 걸어온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탈당은 대통령의 생각이 아니라 밀리고 밀려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으로 본다’고 한 것은 정곡을 찌른 말이다. 6개월 전 총재직 사퇴할 때나, 이번이나 김 대통령은 어쩔 수 없는 궁지에 몰렸다. ‘대통령이 몰리다니…’라고 반문하겠지만 전번엔 당내 갈등으로 집안 민심이 돌아섰고 이번엔 권력비리로 나라안 민심이 돌아섰기 때문이다. 임기 말 대통령이 주위의 압력에 밀렸던 일은 역대 정권에서도 있었다.

그렇다면 대통령에게 탈당을 강력히 권고한 집권세력은 무엇을 노렸던 것일까. 탈당성명이 나오기 무섭게 여권 일각에서는 민주당 당명을 바꾸자는 이야기와 함께 정계개편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요약하자면 대통령 아들들과 권력층에서 비롯된 ‘비리돌풍’ 때문에 새롭게 정치적 입지를 넓히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후보의 지지세가 밀리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실제로 요즘 ‘신민주연합’ 개편론이 유난히 강조되고 있는데 이는 부산지역을 겨냥한 것이고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을 향한 구애(求愛)작전의 일환이다. 지방선거에서 부산시장이라도 건져야 한다는 절박감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 구호는 당초 노 후보가 부르짖었던 ‘신민주개혁연대’에서 ‘개혁’이란 말이 슬그머니 빠진 것인데 왜 그래야 했는지가 아리송하다.

그런데 여기서 집권세력이 놓친 대목이 있다. 우선 김 대통령의 탈당이 ‘노풍’을 압박하고 있는 ‘비리 돌풍’을 차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오히려 ‘비리 돌풍’은 더 거세질 수 있다. 권력비리가 구체적으로 계속 터져 나올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이희호 여사가 아들 문제로 새롭게 거론되는 것이 한 예다. 예상 못했던 상황일 것이다. 결국 집권세력은 빨리 선을 긋고 싶은 욕심에서 권력비리의 규모를 가급적 작게 생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참으로 민심의 동향을 모르는 안이한 발상이 아닌가.

또 다른 문제는 ‘노풍’에 스스로 너무 후한 점수를 줘 왔다는 점이다.‘노풍’은 기본적으로 민주당내에서, 이인제 후보란 맞바람을 맞아 상승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한나라당의 무기력증까지 겹쳐 최고의 상승효과를 연출해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흉흉한 민심을 감안한다면 어떤 ‘노풍’도 ‘비리 돌풍’을 꺾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김 대통령이 당적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아들 문제와 권력비리를 처리할 시간을 남겼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 전쟁에 ‘노풍’을 극력 동원한 세력은 누구인가. 김 대통령을 너무 빨리 몰아친 것은 아무래도 화근(禍根)이 될 것 같다.

▼복잡한 정치기류 남겨▼

더 큰 문제는 조기 탈당에 따라 정국이 대단히 유동적이라는 점이다. 심신이 극도로 피로한 김 대통령의 ‘묵시적 동의’에 따라 앞으로의 정치일정은 집권 일부 세력의 의도에 따라 이리저리 요동칠 개연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당내외 상황을 보면 정계개편도 예상대로 가지 않을 조짐이다. 탈당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가운데 탈당정국은 묘한 메시지를 남겼다. ‘정치판에서 자기를 만들어준 사람은 또한 자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규철 논설실장 ki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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