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황호택]아들을 부르는 제단

  • 입력 2002년 5월 6일 18시 31분


육군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사형수 김대중’은 80년 12월 당시 고교생이던 셋째아들 홍걸씨에게 쓴 편지(옥중서신)에서 아버지로서 못할 일을 한 죄책감을 토로한다. 사춘기에 아버지의 수감생활 연금, 그리고 구속과 사형선고를 지켜본 막내아들에 대한 애틋한 부정(父情)이 옥중서신 곳곳에서 묻어난다. 이희호 여사도 상처한 김 대통령과 늦게 결혼해 마흔 넘어 얻은 혈육에 대한 정이 깊어 홍걸씨의 대소사를 직접 챙겼다고 한다.

전임 대통령이 아들 현철씨로 인해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려드는 것을 지켜보고서도 정보기관이 경계대상으로 올린 인물과 어울리는 홍걸씨를 방치한 처사를 이해하기 어렵다. 자신을 보좌하는 정보기관의 보고보다 ‘어려서부터 정직한 양심을 가졌던’(옥중서신) 막내의 해명을 더 믿었음일까.

▼나라 흔드는 ´홍걸 스캔들´▼

5년 주기로 대통령 아들 비리로 온 나라가 들썩거리는 국제 망신의 해를 맞는다. 한국의 대통령은 임기 말만 되면 아들의 변호사를 챙겨주어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나라가 대통령 아들 문제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에서도 바닥 수준이다.

권력핵심부가 정권 초기부터 최규선씨를 위험한 인물로 파악하고 집중 관리를 했던 흔적이 드러난다. 대통령 친인척 관련 비리의 감시 업무를 담당하던 사직동팀이 최씨를 밀착 견제하다가 옷로비의 여파로 해체된 틈을 타 최씨가 홍걸씨를 끌어들였다는 말이 나온다.

‘약한 모정’에서 원인을 찾는 분석도 있다. 정보기관에서 최규선 커넥션을 종합해 청와대에 보고한 뒤 아버지로부터 질책을 당한 홍걸씨가 어머니에게 ‘아들 말을 믿느냐, 우리 가족을 감시하고 탄압하던 사람들 말을 믿느냐’고 하소연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김 대통령 부부는 홍걸씨의 사생활을 낱낱이 들추어내는 언론에 대해 서운함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대통령 아들은 공인 중 공인이다. 대통령 아들이 얼마짜리 집에서 어떻게 사는지, 1등석 항공료는 무슨 돈으로 지불했는지, 미국에 어떤 자격으로 체류하며 무슨 일을 하는지를 파고드는 것은 언론이 마땅히 할 일이다.

대통령 아들의 생활에도 감시를 받아야 할 공적인 측면과 보호받아야 할 사적인 측면이 있겠지만 공사가 두부 모 가르듯 명확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 공적인 잘못의 연원을 캐 들어가다 보면 불가피하게 사적인 부문에 대해서도 조명이 비추어질 수밖에 없다.

젊은이가 학문에 뜻을 두었으면 세상의 잔 재미와 절연하고 한 우물을 파야 한다. 따분한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으면 직장에 들어가거나 사업을 꾸리면 된다. 미국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따야 꼭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미국에 가보면 부모 잘 만나 유학 와서 대학에 적만 걸어놓고 골프장에서 소일하며 룸펜 생활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홍걸씨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11년(1982∼93년)만에 대학을 졸업했고 남캘리포니아대학(USC)에서 7년(1994∼2000년) 만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로는 USC 연구원 생활을 했다.18년 동안 ‘대학생’이 직업이었고 연구원 생활 2년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큰형과 둘째형은 오랫동안 직업이 없는 생활을 했지만 야당이 혹독한 탄압을 받던 시절에 국내에서 아버지를 도왔다. 홍걸씨의 나이가 어리다 보니 세상 물정에 어두워 간교한 사람의 유혹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다. 올해 한국 나이로 마흔이다.

자녀가 장성하면 부모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 이치이다. 골프공과 아들은 뜻대로 되지 않더라는 명언을 남긴 기업인도 있지만 이러한 이해는 사적인 영역에 한정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것을 보더라도 김 대통령은 아들에 대한 공적 관리를 소홀히 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아들 문제´처리 분명해야▼

오는 대선에서도 대통령 후보의 자녀들을 둘러싼 맹렬한 공방이 예상된다. 이회창 후보는 자녀들의 병역문제로 지난번 대선에서 타격을 받았다. 노무현 후보는 자녀들이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시점이어서 유리한 측면이 있겠지만 대통령이 된 뒤에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두 후보는 자녀들을 투명한 유리 속에 살게 할 각오를 다지는 도리밖에 없다.

‘고민의 나날’을 보내는 김 대통령 부부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어렵게 내놓은 성명서에 아들 관련 비리에 대한 서릿발같은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구약성서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이 하늘의 부름을 받고 아들 이삭을 제단(祭壇)에 바치는 구절이 나온다. ‘하늘의 부름’을 이 시대의 언어로 풀이하면 곧 민심이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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