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25명 필리핀행]작년 입국 장길수군 격려편지

  • 입력 2002년 3월 15일 18시 10분


“뛰어, 더 빨리 뛰어.”

14일 저녁 25명의 탈북자가 경비원의 제지를 뚫고 중국 베이징(北京)의 스페인 대사관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TV 뉴스를 통해 지켜보던 장길수군(18)의 두 손엔 땀이 흥건히 배어 있었다.

지난해 6월 26일 외조부모 등 가족 6명과 함께 자유를 찾아 베이징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CHR)로 들어가던 생각이 났다. 북한으로 송환되면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며 온 가족이 가슴에 품고 있던 쥐약 생각도….

길수는 15일 지난해 자신의 가족이 경험했던 초조감과 불안감을 그대로 겪고 있을 이들 25명을 응원하는 편지를 써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공개했다.

‘목숨을 건 생사의 길에서 과감하게 중국 정부와 맞서고 계시는 여러분들의 힘찬 용기와 결단력에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

지난해 길수네는 지금의 이들처럼 외국 대사관에 우르르 몰려 들어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3인 1조로 각각 다른 계단을 통해 UNHCR 사무실로 숨어 들어갔다.

‘여러분들의 소식을 접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뛰는 마음, 진정을 못합니다. 저희의 형편과 지금 여러분들이 처한 형편이 너무도 똑같고, 여러분의 심정을 저는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엔이 어떤 조치를 취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길수 가족 7명은 가져간 긴 밧줄을 만지작거렸다. 만약 송환 결정이 나면 길수와 형 한길씨(20)가 가족을 서로 꽁꽁 묶어 뿔뿔이 흩어지지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

길수는 편지를 쓰다 이들이 이날 오후 필리핀으로 추방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러분들의 마음만큼 저도 기쁩니다. 여러분들과 전체 탈북자들이 작은 부분이지만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들도 길수네처럼 공식적인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다.

‘저희 가족이 추방당하는 형식으로 제3국을 통해 (한국에) 왔다는 것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자유를 찾아 중국에 머무는 탈북자들이 국제사회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아 당당하게 한국으로 올 수 있도록 희망의 빛이 돼주었으면 합니다.’

편지를 쓰다보니 북한의 어딘지도 모르는 수용소에 갇혀 있다는 어머니와 고향에 남아 있는 아버지, 큰형 생각이 났다.

‘자유의 품에 안기니 부모 형제 생각이 더 간절합니다. 노래를 불러도 부모 형제에 대한 노래만 부릅니다. 꼭 살아계셔서 한 가족이 한 집에 모여 행복하게 살 날만을 기다립니다.’ 외조부모와 함께 서울의 20평 임대아파트에서 사는 길수는 올해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중국에서 2년 동안 지낸 탓에 두살 어린 학생들과 동급생이다. 두살 위 형은 고3이다. 보이는 것은 뭐든지 하고 싶지만 이제는 그것이 뜻대로 안 된다는 걸 알 정도로 서울 생활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거리에서는 열 걸음 정도 갈 때마다 뒤를 돌아본다. 중국에서 혹시 공안(경찰)이 쫓아오지 않나 쳐다보던 것이 버릇이 돼버렸다. 길수는 “작년 중국에서 추방돼 필리핀에 머물 때 한국에 못 올까봐 걱정을 많이 했다”며 “필리핀으로 추방된 탈북자들이 하루 빨리 서울로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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