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지방선거 벌써 과열<2>사전선거운동 백태

  • 입력 2002년 2월 14일 18시 26분


“시장 ○○○입니다. 오늘 생일이시죠. 정말 축하합니다.”

전북의 A시장은 2년여 전부터 매일 아침 생일을 맞은 시민 5명 가량을 선정해 축하전화를 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는 전화를 건 김에 “시정(市政)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시면 적극 반영하겠습니다”고 덧붙인다.

“인터넷 등 다른 방법이 많은데 왜 이런 전화가 필요한 지 모르겠어요. 시간도 없다면서…. 하지만 축하전화를 받고 기분 나빠할 사람은 없을 테니 꽤 효과 있는 선거운동 아닌가요.”

A시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는 김모씨(45)의 말이다.

올해 지방선거일은 6월 13일. 법정 선거운동 기간이 3개월여가 남은 상태지만 선거운동은 오래 전에 이미 시작됐다.

최근 부쩍 늘어난 출판기념회는 일종의 ‘출마기자회견’. 시장 선거에 출마할 예정인 광주 B구청장은 지난해 12월 환경 관련 서적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체육관 선거’는 봤어도 ‘체육관 출판기념회’는 처음이라는 우스갯소리 속에 열린 출판기념회에는 1만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글 싣는 순서▼

- <1>너도나도 출사표

하지만 이런 책들은 대부분 재임기간 중 활동상 등이 지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출판기념회의 ‘진의’를 짐작케 한다.

인터넷의 발달은 사전선거운동의 다양성과 편법성을 한 차원 높였다.

경북의 자치단체장 D씨는 지난해 5월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사진과 직함 이름 등을 초기 화면에 띄우고 자신의 활동상을 담은 동영상 녹화물을 올렸다가 선관위로부터 주의 처분을 받았다.

또 자치단체의 홈페이지에는 자치단체장을 칭송하거나 비난하는 출처불명의 글이 대거 오르기도 한다.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행정기관의 ‘선심성 행정’도 봇물을 이룬다.

대구의 한 구청은 지난해 4월 노후주택밀집지역 재개발사업을 사업시행자인 도시개발공사나 대한주택공사와 사전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해 선거용이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다.

대전시와 일선 구청은 98년부터 2000년까지 관내 사회단체에 무원칙하게 임의보조금을 지급하거나 보조해서는 안 되는 접대성 사업비까지 지원한 것으로 시민단체 조사 결과 밝혀졌다.

현직 단체장이 아닌 경우에는 은밀한 방법으로 자신을 알린다. 활동폭이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경북 지역에서 시장선거에 출마할 공무원 E씨는 택시를 탈 경우 웬만하면 1만원을 내고 거스름돈을 받지 않으면서 은근히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충남 서산의 군의원 출마 예상자 F씨는 자녀의 고시합격 축하 플래카드를 주변의 출마 지역에까지 붙였다가 선관위에 적발됐다.

전문가들은 사전선거운동이 기승을 부리는 이유 중 하나를 ‘공정한 평가시스템의 부재’에서 찾는다.

특히 현직의 경우 업적을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에 선심행정이나 친분 쌓기 등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일부 언론사나 학계 시민단체 등의 평가가 없진 않지만 즉흥적이며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이다.

충남대 육동일(陸東一·자치행정학과) 교수는 “미국 등 선진국은 민선 감사관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유권자들이 이를 잣대로 삼는다”며 “신뢰할 만한 잣대가 있을 때 단체장 등은 열심히 일하면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행정에 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전선거운동을 줄이기 위해서는 평가시스템의 확립과 선거공영제 도입, 그리고 정치 신인의 진출을 막는 불공정한 선거법의 개정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전〓지명훈기자 mhjee@donga.com

전북〓김광오기자 kokim@donga.com

▼선관위 인력부족 허덕…사이버운동 단속은 엄두못내▼

“시장 출마 예정자가 농협 회의에 참석해 인사말을 한 것은 선거법에 저촉되지 않습니까.”

최근 울산시 선거관리위원회에 한 시민이 이 같은 문의전화를 걸어왔다. 선관위 직원들은 이 전화를 받은 뒤 비로소 한 시장 출마 예정자가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는 농협 회의에 참석해 자신의 치적을 홍보한 사실을 확인하고 주의 조치를 내렸다.

울산시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선거 단속 및 조사를 담당하는 지도과 직원은 총 6명. 구(군)청 선관위는 2∼4명에 불과하다.

울산 지역에서 지방선거 출마 예정자(14일 현재 222명)들이 벌써부터 선거법을 예사로 위반하고 있지만 이들 직원만으로는 효율적인 감시가 불가능하다. 시민 제보를 통해 ‘뒷북 단속’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게 선관위의 하소연.

사이버 운동 등 하루가 멀다하고 ‘업그레이드’되는 불법 선거운동에 ‘거북이 단속’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선거일 두 달 전부터 자치단체 소속 공무원을 지원 받아 단속에 나서지만 선거가 끝나면 해당 기관으로 복귀하는 데 따르는 부담감, 구(군)청 선관위 사무실이 자치단체 청사에 무상 입주해 있는 현실 등도 단속의 장애 요인으로 꼽힌다.

선거법 위반 혐의자가 출석이나 임의동행 요구를 거부할 경우 선관위는 ‘단속권’만 있고 ‘수사권’은 없어 검경의 도움 없이는 강제구인을 못하는 것도 선관위 직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다.

울산시 선관위 강천수(姜千洙) 지도과장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적극적인 불법행위 단속을 위해 자치단체 소속이 아닌 교육공무원을 지원받고 사이버 전담반도 편성할 방침”이라고 밝혔으나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라는 지적이다.

울산〓정재락기자 jrju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