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의 진단]왜 색깔 공방 인가

  • 입력 2001년 10월 12일 18시 46분


야당 의원의 ‘색깔공세’와 여당의 반발로 인한 정국 파행이 국회 대정부질문의 ‘단골손님’처럼 돼버렸다. 민생은 뒷전이고 정쟁(政爭)만이 횡행하는 정치권의 살풍경에 국민이 신물을 내는 주된 이유 중 하나다.

지난해 7월 임시국회는 한나라당 권오을(權五乙) 의원의 ‘청와대 친북세력’ 발언으로, 지난해 정기국회는 한나라당 김용갑(金容甲) 의원의 ‘민주당, 조선노동당 2중대’ 발언으로 여야가 어지러운 색깔 공방을 벌였다. 그리고 이번 정기국회 또한 한나라당 안택수(安澤秀) 의원과 김 의원이 제기한 ‘색깔론’으로 정치권이 표류하고 있다.

탈냉전 시대를 맞아 전 지구촌이 하나로 급속히 통합되는 세계화의 격랑을 맞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 정치권에서만 되풀이되고 있는 후진적 색깔 공방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마디로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또 이같은 현상에 대해 “6·25 전쟁과 극단적 이념 대립의 깊은 생채기가 우리 사회에서 채 아물지 못하고 있는 데다 이것이 지역주의와 결합되면서 발전지향적인 논쟁보다는 증오심에 찬 소모적 정쟁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뿐만 아니라 김대중(金大中) 정권 출범 이후 일관되게 추진해 온 햇볕정책이 국민적 합의를 모으는데 실패했고, 보수층에 대한 과소 평가와 자만심이 역공의 빌미를 제공함으로써 야당이 기회 있을 때마다 색깔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서강대 김영수(金英秀) 교수는 “현 정부 들어 집권자들은 색깔론의 토대가 많이 희석됐다고 생각했겠지만 색깔론이 제기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정치문화적 토대는 여전히 강고하다”며 “김 대통령은 이 같은 현실을 직시하고 자만심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경희대 신정현(申正鉉) 교수는 “정부가 대북정책 수립에서 좀더 여론을 수렴하고 이견을 포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지금까지의 대북정책은 야당이나 신중론자들을 설득하는데 소홀히 해온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이 효과적인 정치 공세의 수단으로 색깔론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말로는 대북포용정책을 지지한다고 하면서 각론에 대해서는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듯한 태도는 정책 대안을 제시해야 할 공당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김 대통령 국군의 날 치사만 하더라도 전체 문맥과는 동떨어진 문구 하나를 부각시켜 ‘말꼬리잡기’식 공세를 편 것은 색깔론을 넘어 매카시즘적인 냄새마저 풍기고 있다며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서강대 박호성(朴虎聲) 교수는 “색깔론 공세의 배경에는 대단히 획일적이고 흑백논리적인 독선이 깔려 있고 이는 사상과 이념을 지배집단이 자의적으로 판단해 온 우리 현대사의 산물”이라며 “공포스럽고 음험한 색조”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내에서조차 현 정권을 ‘친북세력’으로 모는 정치 공세에 대해서는 일부 비판론이 제기되고 있다. 한 소장파 의원은 “현 정권이 친북세력이라면 우리는 그럼 친북세력과 정치를 하고 있다는 말이냐”고 물었다.

대정부질문에서 논란이 된 발언을 한 당사자들에 대해 “지역에서 잔치를 벌일 것”이라고 부추기는 지역주의 역시 색깔 공방을 조장하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한나라당 김원웅(金元雄) 의원은 “야당에 비판과 견제 기능이 있지만 이번 발언은 비판기능을 넘어선 파괴주의적 언동”이라며 “냉전적 수구인사들이 지역주의와 결합해 반(反) DJ 정서를 부추기는 것은 시대 흐름에도 맞지 않다”고 말했다.

논란이 된 김대중 대통령과 야당의 대북관련 발언
발언자(때와 장소)발언 내용
정형근 의원
(99.1.14. 부산집회)
(현 정권이) 없는 사실을 악의적으로 조작하고 덤터기 씌우는 것은 공산당이 전형적으로 쓰는 선전선동수법으로 지리산 빨치산 수법이다
김대중 대통령
(2000.2.9 일본 TBS 회견)
김정일 북한 노동당 총비서는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 등을 상당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김용갑 의원
(2000.11.14 국회 대정부질문)
민주당이 조선노동당 2중대로 남한사회를 통째로 김정일에게 갖다 바치는 통일전선전략의 단초가 될 것이다
권철현 대변인
(2001.6.16 논평)
김 대통령이 군의 미온대응을 ‘적절했다’고 평가한 것은 안보 무장해제 선언이다. 김정일 답방 애걸복걸도 도를 지나치고 있다
김만제 정책위의장
(2001.7.24 인천 시국강연회)
김대중 대통령은 외국에서도 용도폐기된 낡은 사회주의적 정책을 쓰고 있다.
권철현 대변인
(2001.8.21 대변인 논평)
(8·15 방북단 파문에서) 통일부는 대한민국의 정부기관이 아니라 북한의 대남선전부 소속 산하기관 같이 행동했다
김 대통령
(2001.9.28 국군의 날 기념사)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세 번의 통일시도가 있었다. 신라의 통일과 고려의 통일, 이 두 번은 성공했다. 하지만 세 번째인 6·25 전쟁은 성공하지 못했다. 네 번째 통일시도는 결코 무력으로 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
안택수 의원
(2001.10.10 국회 대정부질문)
(국군의 날 기념사는) 대통령 자신이 친북적인 이념이나 역사인식을 갖고 있거나, 비서진이 써준 연설원고를 이성적으로 제대로 판단할 능력이 없는 경우일 것이다

<윤영찬기자>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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