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호철의 방북 소감]첫 만남 눈물 안흘린 까닭은

  • 입력 2000년 8월 20일 19시 25분


적십자 지원 요원의 한사람으로 가게 되었다는 첫 기별을 듣고 나서 나는 며칠 동안 흥분 속에 잠겨 있었지만 정작 떠날 날짜가 임박해올수록 뭔가 생소한 느낌, 마음 속 저 깊이 기묘한 떨림 같은 것이 차츰 커져 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떨림이야말로 지난 50년간 재북(在北) 친족을 어쩔 수 없이 통째로 잊어버린 채 이 남쪽 일상에 휘감겨져 살아온 이 나와 그 재북 친족들간의 깊은 골, 그 간극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다 18세 소년으로 전쟁 중에 단신 월남하여 이 남한땅에서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힘으로만 어렵게 살아온 지난 50년이라는 세월이 비로소 하나의 딴딴한 덩어리로 농축되어 와락 달려든다고 할까, 혹은 지난 50년간 까맣게 묻어두고만 살아왔던 북쪽 고향의 조부님을 비롯한 부모님, 출가한 두 누님들, 그리고 동생, 누이동생들이 별안간 50년의 시공을 훌쩍 뛰어넘어 두 눈을 한껏 벌려 뜨고 바로 눈앞으로 달려든다고 할까, 그 떨림의 정체인즉 바로 그런 것이었던 듯하다.

이렇듯 반갑기 이전에 무척 생소하기부터 했던 이 느낌은 평양에 들어가서도 여전하였는데 돌아오기 바로 전날 17일 오전 보통강호텔에서 북쪽 당국의 특별한 배려에 의해 서너시간 단둘만의 오붓한 만남이 이뤄지자 나는 나대로, 누이동생은 누이동생대로, 이게 웬일인가, 백짓장처럼 차분해지던 것이었다. 홑 여덟살과 열여덟살 큰오빠로 헤어졌던 우리 남매의 50년만의 만남이, 이렇게도 담담하고 범연(凡然)스러웠다니, 스스로도 좀처럼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튿날 10시, 두번째이자 이번 방북길의 마지막 만남에서도 역시 매한가지였다. 시종 둘 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서울로 돌아와 텔레비전 화면으로 저 수다한 분들의 아우성과도 같은 호곡들을 접하면서는 새삼 조금 기이하게도 느껴졌다. ‘50년 만에 만난 우리 남매만은 전혀 저렇지가 않았는데… 혹 우리 쪽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그야,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이 우리만의 통한(痛恨)의 50년, 켜켜이 묻어 두었던 아픔들이 저렇게도 극명하게 알알하게 표출되고 있다. 그 화면들을 보면서 다함께 울어버린 이 폭발적인 풍정(風情)이야말로 지난 전쟁의 자국에 다름 아니다. 50년 전의 6·25는 바로 저 모습으로 오늘까지 고냥 고대로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분단국이었지만 동서독간에는 전혀 저런 일이 없었다. 베트남도 마찬가지였다.

꼭 저 지경으로까지 온 강산이 들썩하도록 울음바다가 되어야만 하였을까? 물론 그 정도의 한풀이 한마당은 마땅히 있어야 했을 터이지만 7000만 누구나가 동참했던 이번 이 울음만은 일과성으로만 지날 것이 아니라, 아무쪼록 우리 모두 깊이깊이 지속적으로 육화(肉化)시키는 쪽으로도 공을 들여야 할 것이다.

더구나 지난 ‘6·15선언’으로 시작된 남북간의 새 패러다임은 모름지기 양명(陽明)하게 밝고 분위기부터가 투명하고 건실해야 할 것인데, 어쩌다가, 어디서, 이런 ‘청승’덩어리 하나가 ‘쑤욱’ 고개를 디밀었는가 싶어져, 나 같은 사람은 조금 머엉해지기도 한다. 그리곤 이번 50년만의 첫 ‘만남’에서도 눈물 한방울 안흘리고 차분하게 넘겼던 우리 남매의 그것은 무엇이었던가 하는 걸 조용히 혼자 곱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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