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중위 사건/국방부 수사결과 발표내용]

  • 입력 1999년 4월 14일 19시 50분


국방부 특별합동조사단은 창군이래 최대 조사요원(68명)을 투입해 4개월여 동안 김훈중위 사망사건을 조사한 뒤 자살로 결론내렸다.

특조단측은 재조사 과정에서 검토한 사건현장과 정황증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병사들의 진술, 국내외 법의학자들의 소견 등을 종합해 볼 때 자살로 단정해도 좋다고 확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현장★

김중위가 숨진 채 발견된 판문점 부근의 241GP 3번 지하벙커는 1.97평에 가로 2.56m, 세로 2.50m, 높이 2.20m 크기.

입구에 들어서면 시멘트블록과 모래주머니로 쌓은 기관총 거치대가 보이며 나머지 공간은 두께 10㎝의 모래주머니가 2,3단으로 깔린 통로로 폭이 약 85㎝여서 한꺼번에 2명이 지나가기 어렵다.

현장에서 사용된 총알은 단 1발로 김중위 머리 오른쪽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나왔고 거의 수평인 왼쪽 벽 1백80㎝높이로 날아갔다. 김중위의 옷차림은 단정했고 피는 양쪽머리에서 나와 군복을 타고 바닥에 고였다.

46㎝도 안되는 좁은 공간에서 21㎝길이의 권총으로, 그것도 서 있는 사람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단 1발로 쏘고 자신에게 피를 묻히지 않은 범행은 불가능하다는게 특조단의 분석이다.★부대정황★

소대원들의 타살가능성과 관련해 특조단은 김중위가 근무한 JSA 2소대의 45명 전원을 소환하고 이중 사건당일 241GP안에 있던 27명을 대상으로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벌였으나 아무 혐의를 찾지 못했다. 김중위는 소대원들과 함께 근무한 기간이 28일에 불과해 원한관계가 생기기엔 너무 짧은 기간이라는게 특조단 분석.

북한군과 접촉한 JSA사병들이 북한군에 포섭돼 지령을 받고 김중위를 살해했다는 의혹은 이들이 호기심 때문에 북한군과 만났고 이적성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 만큼 근거가 없다고 특조단은 설명했다.

김중위의 자살동기에 대해 특조단은 최전방에서 북한군과 직접 대치하는 부대환경에 김중위가 완전히 적응하지 못해 무력감을 느끼고, 특히 사건 당일 어두운 표정이었다는 소대원들과 다른 장교들의 진술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법의학적 측면★

김중위 시신에 방어흔이 없어 타살로 보기 어렵다는 고려대 황적준(黃迪駿)교수의 주장에 대해 유족과 함께 타살의혹을 강력히 제기한 재미 법의학자 노여수박사는 “총으로 쏠 때는 반항을 못한다”고 1월15일 법의학 토론회에서 주장했다.

그러나 노박사는 사건 당일 배포한 자료를 통해 “김중위는 몸부림 중에 오른쪽 손에 찰과상을 입고 머리 위를 얻어 맞았다”고 모순되게 말했다.

오른쪽 손의 상처는 반항과정에서 생긴 상처라는 얘기인데 이 부분도 노박사는 토론을 벌이면서 자료내용과 달리 “사후에 생긴 것이니 특별히 두정부 혈종(머리 피멍)은 논의할 의견이 없다”고 후퇴했다.노박사는 또 유서가 없어 자살로 보기 어렵다고 했지만 군당국은 최근 10년간 자살한 장교 중 전체의 55.8%가, 특히 육사출신은 50%가 유서를 안 남긴다고 반박했다.

〈송상근기자〉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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