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극복 노력」 상징적 3대 사건]

  • 입력 1998년 8월 10일 06시 34분


▼ 화해-불가침의 틀 「기본합의서」

남북은 91년12월13일 평양에서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을 갖고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했다. 남북이 분단 후 처음으로 평화공존의 원칙과 방법에 합의한 것이다. 그것은 분단극복을 위한 가장 진지하고 체계적인 노력이었다. 합의서에는 평화공존 상호불가침 경제협력과 교류에 관한 원칙과 그 방법들까지 세세히 명시돼 있다. 합의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대북 포용정책과 동구 공산권의 몰락 등 국제정세의 변화가 맞물려 탄생했다. 기본합의서는 그러나 채택만 됐을 뿐 그 후 남북관계의 악화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합의서 채택 후 남북관계는 북한 핵위기로 오히려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합의서의 실천이 곧 분단극복의 첫 걸음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 이견은 없다. 합의서의 원문을 놓고 남북은 다시 머리를 맞대야 한다.

▼ 『오마니…』 눈물의 「이산가족 재회」

이산가족 교류는 분단의 아픔을 체감케 하는 동시에 그 극복의 당위성을 일깨운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남북은 이산가족 재회를 위해 71년 8월 첫 적십자회담을 가진 이래 70여회의 각종 회담을 가졌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남북이 정부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이산가족을 상봉케 한 것은 85년 9월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교환이 유일하다. 그러나 그 대상은 남측 35가구와 북측 30가구에 불과했다. 이에 실망한 이산가족들은 이후 개인적으로 제삼국을 통해 북녘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서신을 주고받아야 했다. 남북간 주민접촉이 허용된 89년 이후 올 상반기까지 통일부의 승인을 받아 이산가족을 만나거나 생사를 확인한 사람은 모두 1천1백75명이다. 새 정부 또한 대북정책의 최우선순위를 이산가족 교류에 두고 있다.

▼ 「핏줄」확인한 「스포츠-문화교류」

분단극복에는 민간분야의 기여도 컸다. 스포츠와 문화 예술 분야에서 많은 단체가 북측과 교류하면서 협력했고 이것은 남북관계를 탈(脫)정치화시키는 데 도움을 줬다. 91년 5월 남북이 단일팀으로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일본 지바)에서 여자단체전 우승을 차지한 것은 대표적인 예였다. 90년 10월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벌였던 남북 통일축구경기 또한 우리가 왜 하나여야만 하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방법은 달랐지만 급진적이고 충격적인 분단극복 노력도 끊이지 않았다. 89년에 있었던 문익환(文益煥)목사와 임수경(林秀卿)양의 방북을 비롯한 일련의 밀입북사건들이 바로 그 예다. 이들은 나름대로 분단극복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그들이 의도했던 대로 남북관계 개선을 앞당겼는지에 대해서는 의문과 비판의 소리가 많았고 이런 의문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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