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소환 김윤환씨]3共서 文民까지 「큰손」의 곡예사

  • 입력 1997년 4월 14일 20시 12분


한보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14일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은 신한국당 金潤煥(김윤환)고문은 유신시절부터 줄곧 여권에 몸담아 온 드문 정치인이다. 그는 그동안 여러 대형비리사건과 관련, 정치권과 검찰 주변에서 이름이 오르내렸으나 한번도 검찰에 소환되거나 조사를 받은 일이 없었다. 그래서 「곡예사」란 별칭을 얻기도 했다. 김고문은 정치권에서 손이 크기로 널리 알려진 인물. 그는 평소 『돈없이 정치하기는 어렵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로 돈을 정치의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다. 그가 심취해 있는 일본식 계보정치도 결국 보스의 자금조성능력에 의존하는 「금권정치」라는 점에서 돈과 관련된 그의 정치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김고문이 여권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탄탄한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허주(虛舟·김고문의 아호)계보」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특유의 친화력과 정치감각 뿐 아니라 자금조달능력에 크게 힘입었다는 게 정치권의 정설. 그런 그도 현정권 출범 이후에는 『예전같지 않아 힘들다』 『역시 돈은 실세한테 몰린다』는 푸념을 곧잘 하곤 했다. 정치권과 검찰 주변에서 김고문과 관련한 각종 의혹이 새어나오기 시작한 것도 현정권 출범을 전후해서 부터였다. 지난 92년 3.24총선 직후 터진 「민자당가락동연수원 극비매각파문」이 정치자금조성 의혹과 관련해 그가 겪은 첫 시련이었다. 당시 1만8천여평 규모의 가락동연수원 매각은 민자당사무총장이던 김고문과 총재(노태우) 대표(金泳三·김영삼)등 극소수 수뇌부만이 아는 가운데 이뤄져 민자당지도부의 부도덕성이 크게 문제됐다. 그후 김고문은 현정권 출범 첫해인 93년 「슬롯머신사건」수사 때도 당시 H호텔에서 슬롯머신업소를 경영하고 있던 L씨와의 각별한 친분관계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으나 검찰이 내사를 벌이는 도중 L씨가 지병으로 숨지는 바람에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또 94년엔 「상무대비자금 대선자금유입의혹」과 관련해서도 상무대이전공사 당시 민자당사무총장이었던 김고문의 연루설이 제기돼 야당인 민주당이 그를 국회국정조사 증인으로 채택할 것을 요구했으나 여당인 민자당의 거부로 증언대에 서지는 않았다. 95년 「노태우비자금사건」때에도 김고문의 이름이 당연히 정치권과 검찰주변에서 회자됐다. 당시 민자당 대표였던 김고문은 『노씨가 자신의 측근이나 김대통령의 측근을 통해 민자당에 대선자금을 전달했을 가능성은 있다』 『노씨가 민자당에 지원한 대선자금은 노씨가 밝혀야 한다』는 등 묘한 발언으로 김대통령과 신경전을 벌이며 곡예하듯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김고문은 야당의원들에게도 자신이 조성한 정치자금 중 일부를 나눠준 것으로 알려졌다. 여당원내총무를 두차례 역임하면서 원만한 대야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돈의 힘」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고문은 검찰에 소환되기 전날인 13일 『정치자금은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이권이나 청탁과 관련해 돈을 받진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천하의 허주」가 3천만원 때문에 검찰조사를 받아야 하는 현실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당 일각에선 검찰이 집권당대표까지 지낸 김고문을 소환한 것은 단순히 3천만원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아무튼 당관계자들은 이번 소환조사는 노련한 그도 이제는 「덫」에 걸릴 만큼 힘이 쇠약했음을 보여주는 징후로 받아들이고 있다. 〈김창혁·김정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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