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총각의 북한이야기]눈녹여 목욕 『예뻐져요』

  • 입력 1996년 12월 15일 20시 14분


올해는 서울에도 눈이 많다. 그러나 고향에 있을때 흰 눈에 둘러 싸인채 겨울을 보내곤 했던 나에게는 서울에 내리는 눈이 아무래도 성에 차지 않는다. 내가 살던 평안도는 날씨가 매우 추워 눈이 내리면 금방 녹지 않는데다 그위에 다시 눈이 내리고 또 내려 주위에는 항상 눈이 쌓여 있었다. 제주도 등 남한의 남쪽 지역에 사는 청소년들 가운데는 눈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 아프리카도 아닌 한국에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이 몹시 신기하게 느껴졌다. 하여튼 나는 겨울 하면 주위가 온통 흰눈으로 덮여있는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여기 남한도 눈이 조금만 내리면 교통대란 방지대책을 세워야 하는 등 여러가지 조치를 취해야 하지만 북한에서도 눈이 오면 매우 바빠진다. 눈이 오면 우선 이른 새벽에 일어나 애들은 나무판자로 만든 눈치우개나 삽을 들고 나가 자기 집앞 눈을 치웠고 어른들은 인민반별로 동원돼 동네 길가와 주변도로의 눈을 청소했다. 직장이나 학교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수업이 끝난 뒤 삽과 눈치우개를 들고 행진하면서 멀리있는 고속도로에까지 나가 눈을 치우곤 했다. 이렇게 눈이 오면 새벽부터 부산을 떨어야 하는 등 할 일이 많았지만 눈에 익숙한 북한사람들은 비교적 초연하게 대처했다. 눈에 대한 추억도 많았다. 특히 「첫눈을 맞으면 복을 받는다」는 속담이 있어 첫눈이 내리면 너도 나도 밖에 뛰어나가 즐거워하면서 흰 눈을 떠서 먹어 보기도 했다. 개들도 하얗게 변한 세상을 보면서 명절을 만난듯 기뻐하며 눈위에서 뒹굴었다. 여자들은 눈이 내릴 때마다 집밖에 쌓인 눈을 퍼다 녹여 끓인 뒤 목욕을 하거나 머리를 감았다. 빗물을 소독한 수돗물보다 눈을 녹인 물이 피부를 매끄럽게 해주고 머리결의 윤기를 더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눈이 녹으면서 처마밑에 맺힌 고드름을 따서 손에 쥐고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빨아먹는 것도 아이들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눈이 특히 많은 함경도나 양강도지방은 폭설과 눈사태로 열차를 비롯한 모든 교통수단이 마비되고 사상자가 생기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겨울에 함박눈이 펑펑 내려 온 세상이 하얗게 덮이는 것은 정말 기분좋은 일이었다. 全 哲 宇(한양대졸업·89년 동베를린에서 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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