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하씨 증언거부 전말]16년만의 「입다문 외출」

  • 입력 1996년 11월 14일 20시 28분


80년 8월16일 하야한 崔圭夏전대통령이 80년 당시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역사적 격변기를 체험한 증인으로 출두할 것을 처음 요청받은 것은 지난 88년 8월. 청와대를 떠나 서교동 자택에 칩거한지 8년만이었다. 당시 국회 광주민주화운동조사특별위원회는 『全斗煥전대통령 증언에 앞서 崔전대통령의 증언이 필수적』이라고 의결하고 崔전대통령이 국회에서 증언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崔전대통령의 증언요청은 특위소속 여당(민정당)의원 12명이 전부 퇴장한 상태에서 야3당(평민 민주 공화)의원의 표결로 결정됐다. 崔전대통령은 그러나 『전직 국가원수가 재임중의 통치권행사와 관련해 국회에 나가 증언하는 것은 좋지않은 선례가 된다』며 이를 거부했다. 그는 또 국회에 보낸 불출석이유서에서 『출석은 하지 않겠지만 서면조사는 응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아예 서면조사조차 거부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다음해말 국회로부터 국회모욕죄로 고발돼 90년 1월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다. 그후 崔전대통령은 93년 민주당의 12.12조사위가 보낸 17개항의 질의서에도 회신을 하지 않았다. 그는 또 현 정부 출범 이후인 지난 94년 9월과 95년 6월 검찰이 12.12 및 5.18사건 관련참고인 자격으로 서면조사를 요청했으나 이에 불응했다. 崔전대통령의 증언여부가 다시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盧泰愚전대통령 비자금사건이 확대돼 검찰이 불기소결정을 뒤엎고 12.12 및 5.18사건을 다시 조사하면서부터. 崔전대통령은 그러나 검찰의 1, 2차 방문조사에서도 조사검사들에게 차대접만 하고 일체의 진술을 거부했다. 그는 또 12.12와 5.18 1심 재판에서도 증언을 거부했고 2심 재판에서도 출석을 거부하다 14일 끝내 강제구인까지 됐다.〈李炳奇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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