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 별세, 그는 누구?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27일 0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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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새벽 별세한 소석(素石) 이철승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은 7선 국회의원과 신민당 총재 등을 지냈다. 국회부의장과 헌정회 회장 등을 역임했고 2011년부터 대한민국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을 맡고 있었다.

고인은 광복 이후 반탁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45년 반탁한국학생총연맹 결성준비대회를 주관한 뒤 위원장으로 선출됐고, 1946년에는 전국학생총연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백범 김구는 ‘반탁승리’라는 휘호를 써주며 그를 격려했다고 한다.

고인은 6·25전쟁 당시에는 학도의용군을 창설해 65년 만인 2015년 6·25전쟁 참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7선 의원 출신인 그는 한국 야당사의 핵심적 인물로 꼽힌다. 1954년 전북 전주에서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돼 정치권에 입문한 뒤 4, 5, 8, 9, 10, 12대 의원을 지냈다. 1973년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1975년 제30차 유엔총회 한국 대표를 맡기도 했다.

고인은 1970년 신민당 전당대회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다. 당시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경쟁을 벌였다. 1976년에는 신민당 대표를 지냈다.

그는 1955년 민주당을 창당했고,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엔 정치규제를 당해 해외로 망명하기도 했다. 1980년에도 신군부 집권 이후 정치쇄신법에 의해 정치규제를 당하기도 했다.

그는 대한민국건국50주년기념사업준비위원회 회장(1998년)과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총재(2003년), 대한민국 건국단체총연합회 대표의장(2007년) 등을 맡았다.

고인은 2007~2009년 전국 국회의원 모임인 대한민국헌정회 제 15대 회장도 지냈다. 2011년부터는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을 맡았다. 또한 1996년부터 서울평화상문화재단이사장을 맡았다.

고인은 전주고와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일제 강점기 시절인 전주고 재학 시절 일제의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일본인 장교를 목검으로 두들겨 패 무기정학도 받았다. 이어 1942년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에 진학하면서 동아일보 창립자이자 당시 보성전문의 교장이었던 인촌 김성수(1891~1955)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사제지간으로 시작된 인연은 광복 후에도 이어져 반탁운동 도중 한국민주당의 경비대장 역할을 하며 인촌을 가까이에서 보필했다.

고인은 2008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일제강점기 말 학도병에 강제로 끌려가게 됐을 때를 언급하며 “인촌 선생의 지시로 서울시내 다른 대학과 연합해 ‘학병 거부 운동’을 벌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사전에 적발돼 무산됐고, 고인은 보성전문, 경성제대, 연희전문, 명륜전문, 혜화전문 학생 대표들과 함께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총독을 찾아가 “대동아지역 해방을 위해 전쟁을 하는 것이라면 한국부터 먼저 해방시키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고인은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을 가 조그만 집에서 머물던 인촌을 모시기도 했다. 앞서 일제강점기 시절 학도병으로 끌려가기 전 당시 학생들이 시위대를 형성했지만 학교가 폐쇄되면 후배들이 배울 곳조차 없게 된다는 인촌의 설득으로 시위대의 선두를 다시 학교로 돌리기도 했다.

고성호 기자 su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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