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성향이 있나봐 부자만 보면 훔쳐서 가난한 이에게 주고 싶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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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년 5월 17일 16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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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4인’ 스코필드 박사 이야기

최진영 교수(오른쪽), 그리고 그의 두 딸과 담소 중인 스코필드 박사. 1967년 스코필드 박사가 최 교수의 미국 집을 방문했을 때 그의 남편이 촬영한 사진이다.
최진영 교수(오른쪽), 그리고 그의 두 딸과 담소 중인 스코필드 박사. 1967년 스코필드 박사가 최 교수의 미국 집을 방문했을 때 그의 남편이 촬영한 사진이다.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주시오. 내가 도와주던 소년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맡아주세요.’

국립 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유일한 외국인 프랭크 W 스코필드 박사(1889~1970)의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4월 12일은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린 스코필드 박사의 45주기였다. 그리고 내년이면 그가 한국 땅을 밟은 지 꼭 100년이 된다.

1916년 처음 한국을 찾은 스코필드 박사는 1919년 3 · 1운동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일제의 미움을 사 1920년 본국 캐나다로 돌아갔다. 이후 세계 각국에 일제의 잔학행위를 알리는 데 힘썼고, 195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초빙으로 한국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서울대 수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여생을 한국에서 보냈다.

최진영 중앙대 명예교수가 4월 10일 열린 스코필드 박사 서거 45주기 추모기념식에서 그를 기리는 글을 발표했다. 최 교수는 1958년부터 3년간 스코필드 박사의 통역과 비서 업무를 맡았고, 그가 서거할 때까지 서신을 주고받았다. 최 교수는 “그의 수많은 업적은 여러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정 많고 위트 넘치는 인간적 면모는 덜 알려진 것 같아 이 글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1958년, 저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문과 학생이었습니다. 당시 동숭동 캠퍼스 길 건너 의과대학 구내에는 외국인 교수회관이 있었는데, 저는 그곳에서 미국인 교수들의 통역이나 서류 정리 등을 돕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영문과의 권중휘 교수께서 부르시더니 “한국에 국빈으로 오신 유명한 노교수께서 교수회관에 들어오시니 여러모로 도와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네” 하고 교수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처음 스코필드 박사를 뵈었을 때 많이 놀랐습니다. 머리는 백발에 한쪽 다리를 못 써 지팡이를 짚은 채 미소를 지으며 활달하게 인사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저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당시 교수회관은 아래층에 거실, 식당, 부엌과 조그마한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사무실은 미국에서 오신 다른 교수가 이미 사용하고 있었고, 침실은 모두 2층에 있었습니다. 불편한 다리로 2층을 오르내리실 수 있을지 걱정됐는데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박사는 2층에 자리한 방을 침실 겸 사무실로 정하셨습니다.

손수 내의 빨아 입어

저는 그때부터 스코필드 박사의 통역 및 비서 업무를 담당하게 됐습니다. 학교에 강의가 없는 시간에는 교수회관에서 박사와 미국 교수들을 도왔습니다. 박사께 통역이 필요했던 이유는, 1920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추방을 당한 이후 근 40년이 지났기 때문에 오래전에 배운 한국어를 거의 잊으신 까닭이었습니다.

교수회관은 미국 교수들께 영어회화를 배우려는 학생들, 스코필드 박사께 성경 공부를 하러 오는 학생들, 그 밖에 찾아오는 방문객들로 늘 붐볐고, 그 교통정리를 하는 것도 제 몫이었습니다. 박사가 오시기 전, 그리고 머무는 동안을 전후해 교수회관에 체류한 미국 교수들로는 하웰 교수(Dr. A C Howell) 부부, 할로 교수(Dr. Virginia Harlow), 필립스 교수(Dr. Elizabeth Phillips), 그리고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 문정관이던 헨더슨(Gregory Henderson) 부부가 있었습니다.

박사와 제가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영어로 의사소통이 쉬웠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저는 영어로 듣고 말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박사의 말씀을 통역하고 대화하면서, 마치 할아버지와 손녀처럼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박사께서 정성을 쏟으신 고아원이나 중·고등학교에 갈 때면 늘 함께 가서 통역을 했습니다. 2층에 머물던 영국 교수가 떠나자 박사는 제게 그 방에 가끔 와 있으면서 일을 도와달라고 말씀하셨고, 덕분에 박사의 일상생활을 좀 더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게 됐습니다.

박사는 “난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짜고 매운 한국 음식은 먹기 어렵더라”며 주로 양식을 드셨는데, 수프 같은 가벼운 음식이나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셨습니다. 교수회관에는 개성에서 온 부부가 음식과 청소 등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1950년대에는 한국 경제가 워낙 열악했기 때문에 교환교수로 온 미국 교수들에게는 미8군 PX에서 장을 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박사는 식당 아주머니가 한국의 시장에서 장을 봐서 만드는 음식을 드셨습니다.

“운찬은 앞으로 큰일 할 학생”


제가 몹시 놀랐던 것은 박사께서 당신의 몸에 닿았던 내의는 절대로 세탁물로 내어놓지 않고 매일 밤 손수 목욕실에서 세탁하신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주머니가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듣지 않으셨답니다. 또한 계절의 변화에도 개의치 않고 항상 푸른빛 도는 회색 양복 한 벌에 낡아서 베이지색이 되다시피 한 흰 셔츠를 입고 빨간 넥타이를 매셨습니다. 어쩌다가 새 양복을 선물 받아도 다른 일에 쓰시는지,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박사의 일상에서 첫째가는 일은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세계 각처로 후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하루에도 수십 통씩 쓰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타이프를 치거나 우편 업무를 도와드렸습니다. 그다음으로 하는 것이, 열심히 공부하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학비를 보태주는 일이었습니다. 이때 박사께서 처음으로 ‘정운찬’이라는 학생의 이름을 말씀하셨습니다. “집이 어렵지만 명석해 앞으로 큰일을 할 학생”이라며 학비를 보태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운찬 학생의 이름을 기억하게 됐고, 그 후 20여 년이 지나 각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교수가 된 후 스코필드 박사 추모위원회 일을 하면서 만나게 됐습니다.

몇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박사의 서신을 받은 캐나다에서 구호품을 보냈는데 더러 큰 상자들이 올 때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상자를 하나 여시더니 구호품 중에서 치약을 하나 꺼내 “이건 네가 가져라” 하셨습니다. 한국에서 치약이 그리 흔하지 않은 때였습니다. 치약 상자를 열어보니 그 속에 캐나다 앨버타(Alberta)의 한 학생이 한국 고아들에게 보낸다는 쪽지가 들어 있어서 그때 처음 캐나다에 앨버타라는 지방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한번은 상자를 열어보고 고아 아이들이 입기에는 좀 큰 핑크빛 스웨터를 꺼내어 “이건 네가 입어라” 하면서 건네주셨습니다. 저는 그 스웨터를 미국 유학이 끝날 때까지 입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중 박사께서 좋은 곳에 가서 점심을 먹자고 하시면서 스웨덴 의사들이 6 · 25전쟁 당시 머물던 메디컬센터(National Medical Center)로 저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때 저는 뷔페식당을 처음 보았는데 당시에는 그런 종류의 음식을 ‘바이킹(Viking)’이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무엇보다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은 것은 박사의 유머 감각입니다. 유머를 굉장히 좋아하셔서 가끔 인도인이나 아프리카 사람들의 특이한 영어 액센트를 구사하며 저를 웃게 만들곤 하셨습니다. 또 학생들과 게임도 즐기셨는데, 특히 사람의 몸짓을 보고 그것이 나타내는 말을 알아맞히는 ‘셔레이드(charade)’라는 게임을 좋아하셨습니다.

하루는 난데없이 박사께서 “내게 범죄 성향이 좀 있나보다” 하시면서 짓궂게 눈을 꿈벅거리셨습니다. 제가 “네?” 하면서 놀라니까, “나는 부자만 보면 훔쳐서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싶단 말이야”라고 하시는 바람에 함께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언제나 저를 ‘마이 지니(My Jeanie)’라고 부르며 귀여워해주셨습니다.

저는 1959년 졸업을 하고 ‘The Korean Republic’(‘코리아헤럴드’ 전신)에 취직을 했습니다. 유학을 준비하던 저는, 그곳에서 영어로 글을 쓰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박사 역시 ‘The Korea Times’에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칼럼을 쓰고 계셨습니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계속해서 박사를 도와드리며 한편으로는 서울대 대학원 석사과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61년, 여러 시험을 통과해 풀브라이트(Fulbright) 장학생 1호로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최 교수가 스코필드 박사에게서 받은 편지들.
최 교수가 스코필드 박사에게서 받은 편지들.

5, 10달러 동봉한 편지

미국으로 떠나기 전 박사는 저에게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 한국 사회와 국가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는 동안에도 박사와 늘 서신으로 소식을 주고받았는데, 박사는 편지에 ‘The Korea Times’에 게재한 칼럼과 함께 가끔 5달러 내지 10달러씩 동봉해 보내주셨습니다. 미국 주립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이 480달러 정도, 교수의 자녀들을 돌보는 베이비시터 일이 시간당 75센트를 받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후 박사의 건강이 나빠져 1967년 캐나다로 휴가를 떠나시면서 미국에 있는 저희 집에 들러 며칠 머무신 적이 있습니다. 박사께서 좋아하시는 부드러운 쇠고기찜과 통조림 복숭아를 얹은 아이스크림을 드렸더니 “아직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하고 있구나”라며 흐뭇해하셨습니다. 그리고 떠나는 길에 ‘To Jin Young Kim With Love from Grandfather’라고 쓴 기도서를 제게 주셨습니다(당시 저는 결혼을 해서 미국식으로 남편 성을 따라 ‘Kim’이 됐고, 두 딸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박사께서 마지막으로 저를 보러 오셨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1969년 박사는 건강이 악화되어 쇠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다시 찾았고, 돌아가실 때까지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1969년 당시 남편을 따라 뉴욕 컬럼비아대학으로 옮겨가면서 박사께 새 주소를 미처 알리지 못했는데, 그해 12월 도착한 편지에는 어렵게 쓰신 듯한 ‘Where are you?’라는, 저를 찾으시는 물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박사의 편지들과 그분께서 쓰신 글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최진영
1937년 출생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석사(영문학), 서울대 영문학박사 1호
중앙대 영문학과 교수, 한국아메리카학회장
現 한국번역학회 자문, 국제교류진흥원 심사위원

최진영 중앙대 영문학과 명예교수

<이 기사는 신동아 2015년 5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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