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옥바라지까지 한 ‘수인의 아버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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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법관’ 김홍섭 선생 서거 50주기

“나는 비로소 모든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습니다.”(사형수 허태영)

“비길 데 없이 반가운 일, 부럽기조차 한 일이오. … 이제 사람은 갔다. 갔지마는 그와 나 사이의 정의(情誼)는 남는다.”(법관 김홍섭·사진)

▶본보 1957년 10월 1∼3일, ‘정의(情誼): 고 허태영 씨의 고별에 답하여’

생전에 사형수들을 찾아다니며 삶의 용기를 주고 참회의 길로 인도한 ‘사도(使徒)법관’ 김홍섭 선생(1915∼1965·세례명 바오로). 1956년 11월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로 보임된 김 선생은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소장 암살 사건의 주범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허태영 대령을 찾아가 신앙에 귀의할 것을 권했다. 첫 ‘대자(가톨릭에서 신앙의 후견을 받는 사람)’가 된 허 대령이 사형 집행을 앞둔 마지막 순간, 김 선생에게 보낸 감사편지와 김 선생의 답신이 당시 동아일보에 발표되면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렇게 교도소 전교 활동으로 사형수들과 주고받은 편지만 190통에 이른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두고 ‘수인(囚人)들의 아버지’라고 일컬었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 서거 50주기를 맞은 김홍섭 선생의 삶을 기리기 위해 16일 서울 서초구 법원종합청사에서 추념식이 열렸다. 김 선생의 유족을 비롯해 양승태 대법원장, 이상민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하창우 대한변협 회장 등이 참석했다.

양 대법원장은 추념사에서 “김홍섭 선생께서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과 무한한 믿음을 바탕으로 공정한 재판을 하셨고, 당신의 판결로 교도소에 가게 된 이들을 보살피는 등 소외된 이들에 대해 특히 세심한 배려를 보여주셨기에 누구나 선생으로부터 재판받기를 원할 정도였다”고 평했다. 이어 “법관 개개인이 도덕성을 갖지 못할 때 사법부 전체의 권위가 손상되고 신뢰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게 된다”며 “선생이 보여주신 거룩한 삶의 태도와 자세를 통해 법관으로서의 절제와 윤리의식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홍섭 선생은 법조계에서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검찰의 양심’으로 불린 최대교 전 서울고검장과 함께 ‘법조 3성(聖)’으로 꼽히는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고뇌를 하면서 법관은 언제나 겸허한 자세로 인간의 기본적 인권과 양심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양복저고리를 입고 옆구리에 사건 기록과 단무지 도시락을 든 채 매일 집에서 법원까지 걸어 다녀 청렴한 법관의 표상으로 꼽히기도 했다. 1955년 여성 수십 명을 농락해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박인수 사건’에서 혼인빙자간음죄로 기소된 박인수에게 무죄를 선고했던 원심을 깨고 징역 1년을 선고했고, 1957년 장충단 집회방해 사건을 맡아 정치테러의 주범인 유지광에게 실형을 선고한 것이 대표적인 판결이다.

서울고등법원은 18일까지 김홍섭 선생의 자작 스케치와 시, 선생이 입었던 변호사복과 법복, 사형수들과 주고받은 편지 등 유품들을 전시한다.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사도법관#김홍섭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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