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영씨 “배 곯고 쫓겨나고… 이주노동자의 눈물 닦아줘야죠”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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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인권상’ 받은 이천영 외국인근로자문화센터 이사장

이천영 외국인근로자문화센터 이사장(오른쪽)이 10일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현병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2014년 대한민국 인권상’을 받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제공
이천영 외국인근로자문화센터 이사장(오른쪽)이 10일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현병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2014년 대한민국 인권상’을 받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제공
어둠이 짙게 깔리면 집에선 종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낯선 이들이 “사람이 죽었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공동묘지 산지기였던 아버지는 말없이 지게를 지고 사라졌다. 집에 돌아와서는 말했다. “너무 가난해서 관도 살 수 없어 가마니로 둘둘 말아 뒷산에 묻었다.”

1960년대는 굶고 병들고 버림받는 사람이 많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대가 없이 시신을 묻어주고 밥이 소복이 담긴 그릇처럼 생긴 봉분을 만들어 토닥였다. 저세상에서나마 배불리 먹고살라는 기원이었다. 이천영 외국인근로자문화센터 이사장(55·새날학교 교장)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 풍경이다.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열두 살 때부터 공장을 전전했다. 월급이 밀려서 사장에게 항의하다가 매를 맞기도 했다. 껌팔이, 식당 배달, 이발 일을 하면서 길거리를 전전했다. 못 배운 설움이 밀려올 때면 공부를 하고 싶어졌다. 결국 남이 버린 책들을 주워서 공부를 시작했다. 중고교는 검정고시로 마치고, 대학에 입학해 영어교사가 됐다.

한동안 가슴에만 묻어둔 아픈 과거를 다시 떠올린 건 1998년이었다. 가족과 함께 어느 가게에 들어갔다가 오른손목이 잘린 우즈베키스탄 출신 이주노동자를 만났을 때였다. “요즘도 공장에서 월급을 잘 안 주느냐” “밥은 제대로 주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월급이 밀리고 몸도 아파 고통스러워하는 이주민들을 보면서 옛날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때부터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병원에 가고, 각종 도움을 줬다. 소문을 듣고 점점 많은 외국인이 그를 찾아왔다.

동료 교사들의 도움으로 창고 건물을 임대해 ‘외국인근로자문화센터’를 열었다. 이주노동자들이 사랑방처럼 이용하는 공간이었다. 후원 계좌를 만들어 주변의 도움도 구했다.

2004년엔 한 우즈베키스탄 출신 남성이 찾아왔다. 애 때문에 취직이 어려우니 여섯 살 남자아이를 며칠만 맡아 달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 애 아빠의 연락은 끊겼다. 아이를 오래 데리고 있을 형편은 아니었다. 결국 아이를 보육원에 맡기고 매주 찾아갔다. 죄책감이 들었다. 나중에 아이는 아빠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길 바랐다.

이런 아이들을 위해 대안학교를 만들자고 결심했다. 2007년 ‘새날학교’라는 대안학교를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교실은 외국인센터 내에 한 칸, 학생은 2명뿐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늘기 시작했고, 추후 인근 폐교를 임차해 학교도 좀 더 넓은 곳으로 옮겼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여러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면 이 길을 가야만 하겠구나.’

학교를 명예퇴직하고 이주민들을 돕는 일에만 전념하기 시작했다. 새날학교는 2011년에 정규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현재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영국 등 12개국 출신 아이 79명이 다니는 곳으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학교는 교육청 지원금과 후원금으로 운영되며 학비는 무료다. 2010년엔 이주민들에 대한 소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매체인 ‘나눔방송’도 만들어 대표를 맡고 있다.

이 이사장은 10일 국가인권위원회가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연 세계인권선언의날 기념식에서 ‘2014년 대한민국 인권상’을 받았다. 그를 포함해 총 15명이 인권위 위원장 표창을 받았다.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는 근정훈장을, 서인환 한국장애인재단 사무총장은 국민포장을 받았다.

이샘물 기자 evey@donga.com
#대한민국 인권상#외국인근로자문화센터#이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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