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약국집 아들 33명이 모였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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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 김충호-박정은씨 부부 ‘충정장학회’ 장학생-가족들과 30주년 기념식
1년에 2, 3명씩 지금껏 44명 도와줘

17일 강원 고성군에서 열린 충정장학회 30주년 기념식에 설립자 김충호 씨와 아내 박정은 씨 부부(앞줄 가운데)를 비롯해 장학생 33명과 가족들이 참석했다. 고성=이인모 기자 imlee@donga.com
17일 강원 고성군에서 열린 충정장학회 30주년 기념식에 설립자 김충호 씨와 아내 박정은 씨 부부(앞줄 가운데)를 비롯해 장학생 33명과 가족들이 참석했다. 고성=이인모 기자 imlee@donga.com
‘27년 전 시골 양조장 주인이 어려운 학생의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그때의 학생은 이제 약국 주인이 되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장학금 3000만 원을 모았다…속초시 금호동 동제약국 주인 김충호 씨가 세운 충정장학회는 지극히 작은 장학재단이다.’

동아일보 1982년 10월 30일자 사회면 머리기사의 일부다. 당시 김 씨의 사연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기사를 본 이규호 문교부 장관은 100만 원을 기탁했다. 특히 문교부는 충정장학회의 기금이 법정액수(5000만 원)에 모자랐지만 다음 해 10월까지 2000만 원을 더 마련하겠다는 공증을 받고 1982년 11월 재단 설립을 인가했다.

이렇게 시작된 충정장학회가 17일 오후 강원 고성군의 한 호텔에서 다소 늦은 3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설립자이자 이사장인 김충호 씨(77)와 아내 박정은 씨(73)를 비롯해 장학회 임원과 초청 인사 등 400여 명이 참석했다. 충정장학회로부터 도움을 받은 장학생 33명과 가족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충정장학회는 30여 년 동안 속초고와 양양고 졸업생 총 44명에게 3억 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이 중 42명이 졸업 후 사회에 진출했고 2명은 재학 중이다. 졸업생들은 회계사, 변호사, 의사, 약사, 교사 등 다양한 직업으로 각자의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오랜 운영기간에 비해 수혜자가 적은 것은 매년 대학 입학생 2, 3명을 선정해 졸업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아버님이 나를 골라 키워주셨듯이 나 역시 한두 사람이라도 올바로 선택해서 도와주고 싶었다’는 것이 김 씨의 생각이었다.

장학회의 종잣돈이 된 3000만 원은 김 씨가 17년 동안 구두쇠 소리를 들어가며 모은 돈이었다. 이후에도 김 씨는 자신의 땅과 약국 수익금을 출연하며 혼자 힘으로 재단을 이끌다시피 했다. 사회에 진출한 장학생들이 기금을 출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지만 김 씨는 자신이 시작한 장학회는 자신의 힘으로 꾸려 나가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현재 장학회 기금은 1억5000만 원.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예년에 비해 금리는 떨어지고 대학 등록금은 올라 운용이 쉽지 않다. 이 때문에 2006∼2011년에는 장학생 선발이 중단되기도 했다.

김 씨는 “나는 양부의 도움으로 인생 항로가 바뀌었다.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장학사업을 시작했고 양부가 뿌린 씨앗이 이제 44명의 결실이 되어 세상에 퍼져 나갔다. 그동안 힘든 일도 많았지만 힘닿는 데까지 어려운 학생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장학회 설립의 계기가 된 양아버지 박태송 씨(1909∼1996)와의 만남은 59년 전 이뤄졌다. 1955년 3년 개근상과 우등상을 받고 양양중을 졸업한 김 씨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학업을 중단할 처지였다. 그러나 졸업식장에서 김 씨의 사연을 알게 된 지역 유지 박 씨의 도움으로 양양고와 동양의대(경희대 약대 전신)까지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충정장학회의 도움을 받은 장학생들은 김 씨 부부를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른다. 김 씨는 단순히 이들의 대학 등록금만 지원한 것이 아니라 인생의 길잡이 역할을 해 왔다. 졸업식에는 만사를 제쳐두고 참석했고 이들의 결혼식 주례는 항상 김 씨의 몫이었다. 장학생들은 1999년부터 매년 김 씨 부부와 함께 수련회를 열고 명절 때는 김 씨를 찾아 인사를 드린다. 또한 이들은 ‘보은 대물림’을 준비하고 있다. 장학생 대부분이 이에 공감해 사업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속초고 출신의 장학생 서동규 삼일회계법인 부대표(49)는 “우리 모두 장학회의 도움이 없었다면 대학 진학은 고사하고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이라며 “이제 도움만 받았던 지난 기억은 던져버리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속초=이인모 기자 i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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