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들이 철통경계… 대문 활짝 열어 놓고 삽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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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전 60주년… 철원 민통선 마을 ‘이길리’ 국립민속박물관 조사연구 현장

강원 철원군 이길리 민북마을. 12일 방문한 마을은 겉모습으로는 여느 시골마을과 차이가 없었다. 출입을 통제하는 입구의 군 초소는 보안상 촬영이 허가되지 않았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강원 철원군 이길리 민북마을. 12일 방문한 마을은 겉모습으로는 여느 시골마을과 차이가 없었다. 출입을 통제하는 입구의 군 초소는 보안상 촬영이 허가되지 않았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새벽부터 내린 비는 멈출 기색이 없었다.

칡넝쿨처럼 산허리를 싸고도는 희멀건 구름. 뿌연 물안개는 잘금잘금 내려앉다 동구 밖에서 흩어졌다. 짙게 푸른 벼줄기 따라 물살은 콸콸 고랑을 휘젓고…. 바람에 고개 꺾은 오동나무 너머 뻘건 슬레이트 지붕들이 기대섰다. 쌉쌀한 두엄 냄새가 아득한 순간, 세찬 빗방울이 회초리 치듯 타다닥 뺨을 때렸다.

그렇다. 여긴 뻔한 감상에나 젖을 시골자락이 아니다. 민간인출입통제구역(민통선)에 있는 통칭 ‘민북마을’(‘민통선보다 북쪽에 있는 마을’의 준말). 전쟁의 핏빛 상흔이 아린 ‘재건촌’ 이길리였다.

12일 행정구역으로 강원 철원군 동송읍에 속한 이길리 마을을 찾으며 처음 놀란 건 두 가지였다. 민통선이 이리 가까웠나. 폭우로 교통정체를 겪고도 차로 2시간쯤 걸렸다. 게다가 뭐 이리 익숙한 정경인가. 입구에서 군 초소 검문이 없었다면 삼남 지방 어디라 해도 믿었으리라.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요.” 마중 나왔던 우승하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39)가 허허롭게 웃어 보였다. 우 학예사는 민속 조사차 1월부터 상주하고 있다. “처음엔 다른 강원 마을과 뭐가 다른가 걱정했죠. 하지만 살아보면 압니다.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흘렀지만 흉터는 지워진 게 아닙니다. 세월에 아물어 잘 보이지 않을 뿐이죠.”

그의 말대로 이길리는 전쟁과 떼어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1945년 광복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마을은 ‘이념의 혼돈’에 휩싸였다. 북한에 편입된 철원은 광복 한 달 뒤 소련군이 주둔했다. 평양 지도위원이 내려와 붉은 깃발을 휘둘렀고, 순박했던 총각은 완장을 차고 눈알을 부라렸다.

그때 교사였던 김영배 씨(88)는 “당시 김일성이 철원 금화를 핵심 요지로 여겼다더라. 당이 ‘열성부락’이네 뭐네 공 많이 들였다”고 말했다. 좌우로 갈린 주민의 충돌도 벌어졌다. 어디론가 끌려가 사라지고, 목숨 걸고 38선을 넘는 이들도 속출했다.

6·25전쟁이 터졌을 땐 오히려 잠잠했다. 어차피 북한 땅이었으니. 전쟁의 공포가 엄습한 건 1·4후퇴 이후였다. 피란 떠난 마을은 포화로 모조리 파괴됐다. 중부전선에서 가장 치열했던 ‘철의 삼각지’였으니…. 어르신들은 “마을도 망가졌지만 산신제 같은 풍속도 잊혀져 버렸다”고 한숨지었다.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정전협정이 맺어졌다. 다행히 이길리는 남한 영토가 됐다. 하지만 그게 주민들의 귀향을 보장하진 않았다. 민간인 통제로 묶여 버린 땅. 마을을 지척에 두고도 멀뚱하니 시름시름 바라만 봤다.

소에게 여물을 주는 주민 이춘희 씨(52).
소에게 여물을 주는 주민 이춘희 씨(52).
출입이 허락된 건 3년 뒤였다. 농사라도 짓자는 읍소가 조건부 제한통행으로 되돌아왔다. 낮에 3명 이상 자전거 이동, 지정된 빨간 모자 쓴 남성만. 1962년에야 농번기 임시 거주가 허락됐다. 아침저녁 군 점호를 받았고, 사람이 숨을 만한 옥수수는 심지 못했다. A 씨(84)는 “1965년 북한에서 장마로 떠내려 온 소를 ‘자유 찾아 탈출했다’며 크게 선전하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1971년 마을이 재건촌이 되면서 20년 만에 주민의 귀향이 허용됐다. 북한 측 선전촌에 대응하려는 정치적 목적의 결정이었다. 김명찬 마을이장(58)은 “군사정부 때까지 점호가 유지되고, 1990년대도 지뢰폭발사고가 벌어지는 등 힘든 시절도 있었지만 세월 따라 우리도 천천히 적응해 갔다”고 말했다.

그렇게 60년을 버틴 이길리는 거주 만족도가 매우 높은 마을이 됐다. 여전히 야간통행금지나 건물 신·증축 허가 등 불편이 남았지만 무엇보다 치안이 훌륭하다. 76가구 주민 170여 명은 모든 문을 열어두고 열쇠도 없이 다닌단다. 군과의 관계도 좋아졌다. 권위를 벗고 이젠 작은 일도 상의해 온다. 대민지원도 원활하다. 김일남 씨(52)는 “민북마을을 해제한다고 하면 마을사람 모두 데모할 것”이라고 말했다. 허나 주민들은 ‘너무도’ 안보에 둔감했다. 5∼6년 전까지도 대남방송이 쩌렁쩌렁했다는데 최근 남북경색에 꿈쩍도 하질 않았다. 정치나 전쟁은 아예 신경도 쓰질 않았다. 한 마을주민은 “북에서 미사일 쏘면 서울로 날아가겠지. 우린 군인이 ‘철통같이’ 지켜주잖아”라며 심드렁했다. 왠지 모를 위화감이 콧잔등을 윙윙거렸다.

낯부끄러운 전시행정도 거슬렸다. 명색이 민북마을인데 방공호 시설이 지난해 들어섰다. 2011년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였다. 내부에 들어가니 겉만 멀끔했지 바닥은 습기로 물이 흥건했다. 덮고 잘 담요 하나 없었다. 방독면은 2001년 제조돼 유효기간(5년)을 넘긴 지 오래. 새마을지도자인 김종화 씨(42)는 “특별지원은 바라지도 않는다. 진짜 마을에 필요한 게 뭔지 살펴 달라”고 당부했다.

해질 녘, 짐을 꾸리는데 마을회관 옥상에 재두루미 모형이 보였다. 지난해 시작한 ‘두루미 축제’ 상징물이다. 정전 60년은 민통선을 천혜의 자연보고로 만들었다. 주민들은 이제 마을이 안보체험소가 아닌 생태관광지가 되길 바란다. 멀리 한탄강에 몰아치는 빗방울은 더욱 거세졌다. 지금은 뭐가 떠내려가고 있을까.

철원=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이길리#민북마을#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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