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팔순 할머니들 “개성서 동창회 여는 날 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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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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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공립고등여학교 학생들 42년째 ‘애틋한 동창회’

14일 오후 1시경 인천 부평구 부평동의 한 식당에서 열린 동창회 자리에서 개성공립고등여학교 출신 할머니들이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하며 함박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6·25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12월 개성에서 피란해 남한으로 온 할머니들은 40세가 다 된 1970년 첫 동창회를 연 이후 한 달에 한 번씩 40년 넘게 동창회를 열고 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14일 오후 1시경 인천 부평구 부평동의 한 식당에서 열린 동창회 자리에서 개성공립고등여학교 출신 할머니들이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하며 함박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6·25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12월 개성에서 피란해 남한으로 온 할머니들은 40세가 다 된 1970년 첫 동창회를 연 이후 한 달에 한 번씩 40년 넘게 동창회를 열고 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이 지지배(계집아이의 경기 사투리)야. 아픈 사람 치고 얼굴이 고와 보여서 좋다 좋아. 오느라고 고생했다. 수고했어.”

김영옥 할머니(81)가 식당에 들어서자 장정옥 할머니(81)는 한걸음에 뛰어나가 김 할머니 얼굴을 연방 쓰다듬었다. 김 할머니는 지난달 폐암 수술을 받았지만 동창 모임에 빠질 수 없어 아픈 몸을 이끌고 외출을 했다. 김 할머니가 “한 달 만에 너희 본다고 얼굴에 분칠도 했다”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자 할머니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소녀처럼 깔깔거리며 웃었다.

14일 오후 1시경 인천 부평구 부평동의 한 식당. 이날 할머니 8명은 한 달 만에 ‘개성고녀(개성공립고등여학교)’ 동창회를 열었다. 모두 80세가 넘었지만 이날만은 1950년 당시 10대 후반 소녀였던 때로 돌아간 듯한 표정이었다. 할머니들은 인근 남학교 학생들과 배구 연습 경기를 하며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했던 여고 시절의 풋풋한 이야기를 나누며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김 할머니는 “나는 온몸이 암덩어리지만 ‘지지배’들을 만나 옛날 얘기를 하면 아픈 게 다 낫는 것 같다”며 “동창회가 아니라 고향 개성에 온 것 같다”라고 했다.

할머니들은 매달 인천이나 서울의 식당에서 동창회를 하고 있다. 1970년 서울 종로구 종각 인근의 한 식당에서 첫 동창회를 연 뒤 벌써 42년째다.

할머니들은 모두 6·25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12월 개성시 남산동 용수산 아래 개성고등여학교 6학년(현재 고교 3학년)에 다니다 ‘인민군을 피해 임진강 건너로 피란하라’는 방을 보고 남한으로 왔다. 마을에는 ‘인민군이 동네 처녀들을 잡아간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졸업을 2개월 앞둔 할머니들은 집을 지키던 어머니와 남은 형제들이 “아버지와 동생들을 데리고 딱 일주일만 남한에 가 있어라”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임진강을 따라 남한으로 왔다가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졸업을 하지 못하고 피란하는 것이 안타까워 학교가 미리 내준 졸업장을 품에 안은 채였다. 그리고 60년이 넘게 고향땅과 학교 모습을 보지 못했다.

대학에 진학해 각각 약사, 시조시인이 되려고 했던 장 할머니와 우숙자 할머니(80)는 전란으로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서울과 인천에 정착해 결혼을 하고 각자 일을 하면서 여고 시절과 고향을 그리워하다 40세가 가까워질 무렵 동창들과 연락이 돼 동창회를 열게 됐다.

6·25전쟁 발발 전 개성고녀 교정에서 찍은사진. 할머니들은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나서 사진을 봐도 이제 누가 누군지 구분이 잘 안된다”고 말했다. 우숙자 할머니 제공
6·25전쟁 발발 전 개성고녀 교정에서 찍은사진. 할머니들은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나서 사진을 봐도 이제 누가 누군지 구분이 잘 안된다”고 말했다. 우숙자 할머니 제공
우 할머니는 방송통신대 국문과를 졸업했고 시조시인으로도 등단해 늦게나마 꿈을 이뤘다. 할머니들은 40년간 동창회를 열며 전란에 포기했던 꿈을 이뤄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서로를 격려했다. 엄마 없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던 이야기를 나누면서는 자매처럼 늘 함께 눈물을 흘렸다.

세월이 흐르면서 초창기 40명에 가까웠던 동창회 참가자들은 8명으로 줄었다. 20여 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병상에 있어 나오지 못한다. 할머니들은 먼저 간 친구, 두고 온 가족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감정에 복받친 듯 눈물을 글썽였다.

빛바랜 여고 시절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던 우 할머니 눈에 눈물이 고였다.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나서 이 사진을 봐도 누가 누군지 구별이 안 돼. 어서 통일이 돼 용수산 아래 우리 학교 가서 이렇게 다 모여 동창회를 하면 얼마나 좋겠어. 집에 뛰어가서 엄마도 보고 말이야.”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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