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진석]한국車 업계가 ‘사브’ 파산서 배워야 할 점

  • Array
  • 입력 2011년 12월 21일 03시 00분


코멘트
이진석 산업부 기자
이진석 산업부 기자
“지금까지 쌓아온 경력에서 오늘이 가장 암울한 날이다.”

스웨덴 자동차업체인 사브(SAAB)가 19일(현지 시간) 파산 보호를 신청했다. 창립 74년 역사에 마침표를 찍은 빅토르 뮐러 최고경영자(CEO)는 기자회견에서 비통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항공기 산업으로 출발해 혁신적 신기술을 선보였던 사브는 글로벌 경쟁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1937년 항공기 회사로 출발한 사브는 ‘혁신의 대명사’였다. 항공기 제작 경험에서 얻어진 기술을 승용차에 접목하며 한 시대를 휘어잡았다. 제트기 터보엔진을 양산 차량에 도입하고 공기역학기술을 차체에 활용해 자동차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자동차 마니아들에게는 ‘지상에서 달리는 제트기’라는 찬사를 받으며 명차 반열에 올랐다. 1978년 출시돼 1998년까지 20년간 명맥을 유지한 ‘900’은 미국 여피족(Yuppie族·도시 근교에 살며 고소득을 올리는 전문직 젊은이들)의 ‘아이콘’과도 같았다.

사브의 변곡점은 미국 제너럴모터스(GM)에 인수된 1989년이다. 이때부터 사브는 시장의 변화에 둔감해졌다. 대규모 생산에 익숙한 GM 경영진은 회사 경영에 과도하게 개입하며 정체성을 흐렸다. 소량 주문생산 대신 대량생산을, 신기술 개발보다 원가 절감을, 변화보다 안정을 추구하며 사브 고유의 특색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최고의 세련미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던 디자인도 변화를 시도하지 않아 시대 흐름에 뒤처졌다. ‘혁신의 대명사’는 또 하나의 ‘무난한 미국차’가 돼버렸다.

사브 제품의 상품성은 타사 차종에 뒤처지기 시작했고 이렇다 할 판매 증대 방안도 없었다. ‘특이한 고급차’로 통하며 틈새시장에서 각광받던 사브는 GM에 인수된 후 완전히 개성을 잃고 판매 부진에 빠졌다. 포르셰, 재규어처럼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프리미엄 브랜드의 이미지도 갖지 못했다. 2008년 금융위기를 맞은 GM은 사브의 매각을 결정했다.

하지만 “스웨덴 자동차의 자존심을 찾겠다”며 지난해 사브를 인수한 스웨디시오토모빌은 직원 수가 100여 명에 불과한 네덜란드계 소규모 고급차업체였다. ‘고래’ 사브를 삼키기에는 역부족인 작은 ‘새우’였다. 경영난은 악화했고 올 3월부터는 공장 가동을 중단한 뒤 마땅한 인수자를 찾지 못했다.

작고 날렵했던 사브는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거대 기업의 부속물로 전락해 파산에 이르렀다. 주인을 잘못 만난 것이다. 자동차산업은 먹고 먹히는 적자생존의 역사다. 좋은 조건을 내세운 곳보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살릴 수 있는 주인을 선택했으면 결과가 어땠을까.

이진석 산업부 기자 gen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