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1>최재천 교수가 말하는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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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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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과학철학 넘나드는 21세기 토머스 쿤”

최재천 교수
최재천 교수
《‘명사가 쓰는 100인 이야기’를 7회에 걸쳐 싣습니다. 올해 선정된 ‘10년 후 한국을 빛낼 100인’의 알려지지 않은 모습을 스승과 선배, 동료 등 유명인사가 공개합니다. 개인적 인연의 소개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와 독자 여러분이 참고할 만한 시사점도 제시합니다.》

절대온도라는 게 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일체의 분자운동이 일어나지 않아 열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 이론적 최저온도를 절대 0도로 가정하고 분자운동의 정도에 따라 온도를 측정한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물이 어는점을 0도, 그리고 끓는점을 100도로 정하고 뜨거움과 차가움의 상대적인 정도를 측정하는 섭씨온도를 사용한다. 문제는 ‘물은 항상 일정한 온도에서 얼고 끓는다’라는 가설을 바탕으로 만든 온도계로 재보았더니 물을 담은 용기의 매개물질에 따라서 끓는점이 달라지더라는 것이다. 온도계를 만들어낸 가설이 온도계에 의해 무너지고 있다.

이처럼 온도계에 얽힌 과학, 역사, 그리고 철학을 통해 우리가 아무런 의심 없이 믿고 있던 과학적 상식을 뒤엎은 책 ‘온도 발명하기(Inventing Temperature)’로 2007년 과학철학 분야 최고 권위의 러커토시상을 받고 일약 대가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 바로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과학철학자 장하석 교수다. 그는 지난해 9월 ‘나쁜 사마리아인들’과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등의 베스트셀러로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그의 친형 장하준 교수가 경제학과 교수로 있는 케임브리지대의 과학사·과학철학과에 젊은 석좌교수로 부임했다.

2009년 5월 13일이었다. 마침 옥스퍼드대와 런던정경대를 방문하기 위해 런던에 머물고 있던 나는 그의 런던대 교수 취임 기념강연이 열린다고 해 단숨에 달려갔다. 늦은 것도 아닌데 이미 강연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 때문에 나는 층계에 걸터앉아 강의를 들어야 했다. 약간의 외국인 특유의 억양은 있었지만 풍부한 어휘와 40대 초반의 젊은 학자로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권위가 묻어나는 그의 존재감에 나는 벅찬 감동을 억누르지 못해 정작 강연 내용에는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저만치 건너편에, 공항에서 곧바로 온 듯 커다란 여행가방을 옆에 끼고 앉아 있는 장하준 교수의 얼굴에서도 비슷한 감흥을 느낄 수 있었다. 강연이 끝난 뒤 벌어진 축하연은 잠시라도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는 4일 부친인 장재식 전 산업자원부 장관의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개념들의 뿌리를 파헤치는 일에 힘을 쏟겠다”고 말했
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방한한 장 교수는 7일 출국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는 4일 부친인 장재식 전 산업자원부 장관의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개념들의 뿌리를 파헤치는 일에 힘을 쏟겠다”고 말했 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방한한 장 교수는 7일 출국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장하석 교수가 젊은 나이임에도 세계 과학철학계의 주목을 받는 까닭은 그가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넘나드는 몇 안 되는 귀한 학자이기 때문이다. 함께 인문학에 몸담고 있지만 역사학과 철학은 사실 방법론과 개념이 매우 다른 학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종종 과학사와 과학철학 모두에서 큰 업적을 남긴 토머스 쿤에 비견된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2007년 발표한 ‘사례연구를 넘어서, 철학으로서의 역사(Beyond case-studies: history as philosophy)’라는 논문에서 그는 과학사와 과학철학은 애당초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동시에 둘을 함께 연구할 수 없다”고 말한 쿤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과학철학이 궁극적으로는 과학적 지식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서도 끝내 그에 대해 명확한 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한 쿤과 달리 장하석 교수는 실제로 그 둘을 ‘통섭하는’ 연구결과들을 내놓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의 제목에서 그를 ‘21세기 토머스 쿤’이라고 불렀지만, 내심 그가 쿤을 능가하는 학자가 되어주길 기대하고 있고 능히 그리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다만 중학교 시절부터 서양에 유학해 전형적인 서양 맥락의 연구를 하는 그가 ‘대한민국이 낳은 세계적인 과학철학자’라는 우리 국민의 호사를 넘어 우리나라 과학철학의 발전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국내 대학으로 모셔오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혹여 그리 하고 싶어도 우리는 여건이 되어 있지 않다. 케임브리지와 하버드를 비롯해 자연과학이 특별히 강한 세계적인 대학들에는 대개 과학사나 과학철학을 전공하는 독립적인 학과 또는 연구센터들이 있다. 과학의 역사와 철학을 기반으로 쌓아 올리는 과학의 질이 그렇지 않은 과학보다 훨씬 우수하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과학사학자와 과학철학자를 배출한 서울대의 ‘과사철’이 여전히 협동과정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심히 안타깝다.

이화여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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